[경기 작가를 해석하다, 평론가 연재 ③-시인 박한]
“이파리 가득한 가지 사이에 송혜희가 없다.”(‘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 주세요’) 시집을 펼치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시인을 신뢰해도 좋겠다. 누군가의 실종을 알리는 현수막 앞에서 바쁜 걸음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간절한 사연이 부가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그들의 사라짐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좀’이라는 글자에 추월당한 채” 생각한다. ‘좀’이라는 단 하나의 음절에 내포된, 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질량이 응축된 슬픔의 중압에 대해.
박한은 2018년 지용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2023년 첫 시집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을 펴냈다. 시집은 “네가 영원히 하선해버린/그 하루를 인양하기 위해”(‘빈 배-육지의 노래’), “나는 이제 함부로 눈을 뭉치지 못하겠지”(‘나는 이제-10월29일 이태원’)라는 진술과 함께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예기치 않은 부재를 고스란히 견뎌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기억에 새긴다. 또한 각자의 삶에 과적된 무게로 이미 “구겨”(‘깡통을 줍는 노인’)질대로 구겨지거나 “흉터를 흉터로 부축하는”(‘서울전파사’)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의 슬픔들과 마주 않는다. 도무지 총량을 가늠할 수 없는 이 슬픔의 압력에 가끔은 고개를 저을 법도 하지만 시인은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순한 골목’)라는 선언으로 자신을 찾아와 두드리는 온갖 슬픔들을 온전히 감싸안기로 한다.
박한은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슬픔에는 저항하지 않는, 아니 애초에 저항할 수 없는 ‘순(順)’하고 ‘순(純)’한 시인’이다. 시인은 우리의 곁에 산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슬픔의 심연에 “제대로 착륙하기 위해선/더 많이 기울어져야 한다고”(‘퍼스트 맨’) 다짐하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한 음을 찾기 위해” “상처투성이”의 “무릎”(‘세밑’)을 가진 시인의 옷은 “그래서 늘 상복”(‘저녁의 매무새’)이다.
언제까지나 슬픔과 함께 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른다. 다만 첨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여정에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슬픔에 더 많이 기울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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