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역사로 본 평화와 전쟁’

이 이(1536~1584)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김성일은 10만 양병을 반대하였다. 선조 23년 1590년 통신사 부사로 일본현지를 가보고 와서 평화무드가 깨지면 공연히 백성들이 괴로워한다고 했다. 김성일과 함께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간 황윤길은 귀국하여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생각이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황윤길의 의견은 무시되고 당시 동인이 강성하던 김성일의 평화론이 받아들여졌다. 2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불을 지르고 백성을 죽이고 잡아갔다.

1131년 중국 남송의 재상 진회(1090~1155)는 고종의 신임을 받자 북방의 여진(금나라) 세력과 송나라에 대한 침략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평화주의자들이 화친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다. 진회는 전쟁의 영웅 악비를 옥에 가두고 급기야 죽게 하였다. 2년후 1140년에 남송은 금나라의 전면 공격으로 국파산하고 말았다.

1938년 9월 영국의 평화주의자 체임벌린 수상이 뮌헨협정을 맺고 런던으로 귀국하여 이 시대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외쳤다. 히틀러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처칠을 전쟁 미치광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듬해 또 다른 영토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독일에게 영국은 1937년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2차 세계대전의 점화가 발생했다.

1969년에 미국 안보보좌관에 취임한 키신저는 우방인 베트남의 주장을 대폭 양보 시키며, 침공세력인 북부월맹군에게 여유와 정비기간을 주게 만든, 월맹과의 전쟁을 당분간 중지시키는 파리평화회담으로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2년후 1975년 자유월남은 패망했다.

1946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북한공산당은 남북협상을 믿는 김구와 지지자들이 김일성의 전략적 집회에 연석으로 참석하는 동안 자유와 안전보장에 주력한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고 신뢰하는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북한은 1950년6월25일 무력남침을 감행했다. 어언간에 50년이 지난 지금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현된 가운데 한편으로는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핵으로 인한 북미대결 양상이 무척 불안하다. 하지만 유비무환으로 어떻게든 평화를 지켜야 한다.

/이 경 순

평화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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