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잊지 못할 스승님들

중학교 1학년때 세계사를 가르쳤던 박종무 선생님은 참 멋쟁이 선생님이셨다. 서구적인 얼굴에 기름을 발라 곱게 빗어 넘긴 머리가 꼭 영화배우를 연상시켰다. 여기에다 박 선생님은 독특한 음성으로 열정을 다해 세계사를 가르쳤다. 이래서 나는 국어 시간 다음으로 세계사 시간을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때 지리를 가르쳤던 박노철 선생님은 군인을 연상시켰다. 반장의 구령에 맞춰 우리들이 인사를 하면 언제나 거수 경례로 받곤 하셨다. 말씀도 우렁찼고 걸음새도 제식훈련하듯 하셨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농업고등학교와 함께 있는 학교라서 가을이면 퇴비 증산에 모든 학생이 참가해야만 했다. 할당된 퇴비를 가져가서 합격증을 받아야만 하였다. 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가까스로 퇴비의 양을 채우곤 했는데 담임이셨던 박노철 선생님은 퇴비를 못해온 학생들을 향해 “윤수천이도 해왔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뭣들 했냐?”하시며 나무라곤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때 내가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오자 이미 그때 퇴직을 하시고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시던 박 선생님은 손수 붓글씨로 호외를 써서 안성 시내 곳곳에다 붙이셨다. 당신이 가르쳤던 제자의 입상을 기뻐한 나머지 애정의 표시를 그렇게 야단스럽게 하셨던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문예반을 지도하셨던 정장현 선생님은 형님 같은 분이셨다. 백일장이나 문예작품 공모에서 입상을 하면 우리 문예반원들을 중국집으로 데려가서 탕수육에다 백알을 사주곤 하셨다. 게다가 백일장에라도 나갈 때엔 선생님들이나 탈 수 있는 출장비를 타내서는 우리들의 호주머니 걱정을 덜으셨다. 그래서 출장비를 타 가지고 백일장을 나갈 때면 늘 심적인 부담감이 크곤 하였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누군가 한두 사람쯤은 꼭 입상자의 대열에 끼어서 선생님 체면을 세워드리곤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체육을 가르쳤던 염희모 선생님은 후리후리한 키에 얼굴도 미남이셨다. 한 번은 단짝인 조충래와 영화를 보려고 표를 끊으려는데 하필이면 염 선생님한테 걸리고 말았다. 이거 꼼짝없이 걸렸구나. 겁이 더럭 나는데 염 선생님은 자신의 돈으로 표 두장을 사주면서 “너희들 문학할 놈들이라서 봐주는 거야. 영화 끝나면 곧장 집에 가”하는 것이 아닌가! 이 날 염치도 좋게 선생님 돈으로 구경까지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해진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나는 이 무렵이 되면 못내 학창 시절이 그리워오고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어른거린다. 조금은 철이 지난 양복 차림으로 도시락을 싸 들고 부지런히 교문을 들어서시던 모습. 우리들의 인사에 넉넉한 웃음과 미소를 보내주시던 자애로운 모습. 열성을 다해 가르치시던 푸르른 모습. 때론 우리와 함께 어울려 운동장을 뛰며 친구하던 모습.

되돌아보면 그분들은 ‘선생님’이란 직분을 참 사랑하신 분들이었고 무엇보다도 천직으로 아신 분들이셨다. 그리고 가르치시는 것 외에는 다른 곳에 결코 한눈을 팔지 않는 분들이셨다.

스승의 날을 맞으며 내가 그 분들을 잊지 못하는 것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나의 동화 쓰는 일도 그분들의 한눈 팔지 않는 그 정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는지.

/윤수천.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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