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옛날에는 지독하게 말 안듣고 공부안하는 자식들에게 부모님들이 써먹던 “그래, 공부하기 싫으면 평생 농사나 짓고 살아라”는 말은 우리 부모세대들의 호소였고 비난이었다.
젊은 시절, 고단하게 살다 쓰디 쓴 실패를 맛본 어떤 인생들은 술 한잔 걸치고 마지막 카드로 뽑아쓰는 말로 “그래, 농사나 짓고 살자”였으나 농사처라도 있으면 천대하고 멸시 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지게에 볏단을 스물대여섯단을 싣고 운반하던 70년대 초만해도 농업은, 농촌은, 농민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과 서로 어우러지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 농촌과 농업의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농정사상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현실인 지금, 그야말로 말이 아니다. 우리 나라 농업이 위기 상황이라는 인식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위기의 실상에 대해 체감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일반 국민은 물론, 정부나 농민단체 심지어 현장의 농민들마저도 막연한 위기감만 느낄 뿐이다.
양치기소년의 우화처럼 위기론이 상투화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농업위기가 드러나 있지 않은 까닭이라고나 할까.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경제 대국들의 침략주의적인 쌀시장 개방, 농산물시장개방 압력 때문에 민족농업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져가고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단계적으로 농산물시장을 개방할 수 있게 한 UR협상이 끝난지 10년이 되면서 정부에서는 UR협상으로 타격받은 농업을 지원하여 살리기 위해 농특세라는 목적세를 도입, 막대한 예산을 농어가 부채탕감과 소득을 보전해주는 소비성 부문에 투자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다 보니 전국 농민단체 및 농민들의 집단행동은 물론, 국내외에서의 목숨을 던지는 자살현장을 보면서 농업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냉혹한 현실에서 개방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다고 하면서 한쪽 목소리만 높여서는 결국 국가 전체가 손해라는 것을 알게됐다.
앞으로 WTO협상이 완전 타결될 경우 수입농산물에 대한 대폭적인 관세인하를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며 이 경우 수입농산물의 국내시장 침투로 우리 나라 농업은 붕괴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처할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는 FTA, DDA, 쌀 재협상 등 개방확대에 대비, 앞으로 10년간 119조원을 농어촌에 투자하는 ‘농업종합지원 대책’을 마련, 도시자본을 끌어들여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생활여건을 만들고 경작규모를 늘려 농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대책을 마련 중이다. 10년간 119조원 지원규모는 ‘크다’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돈보다는 내용이 먼저다. 사업의 타당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결정하여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할 것이다.
분명히 농업은 농촌에 있는 산업의 일부로써, 앞으로 전개될 민족농업에 대해 일반국민은 물론, 농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강 건너 불 보듯이 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닥친 상황이 민족최대의 위기임을 깨달아야 한다. 힘의 우위를 앞세우는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죽이기 위한 개방압력에 대해 이제 정부는 물론 국민모두가 민족의 자존심인 민족농업을 지켜야 한다.
최소한 쌀만이라도 지켜야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이 저주가 아닌 축복의 명제가 되도록 농업의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다.
/박종유.농업기반공사 평택지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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