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7월 프랑스 파리로 건축기행을 간 적이 있다. 마침 내가 묵는 호텔이 라 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 바로 앞이어서,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고 저녁에는 일행과 공원에서 이런저런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그곳이 너무 좋아 일정을 변경해 며칠 더 머물면서, 우리 수원시에도 이런 공원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게 기억난다.
파리 동북부에 위치한 라 빌레트(La villette) 지구(약 16만 6천여평)는 1974년 이전엔 도살장과 우시장이었던 곳이다. 라 빌레트 공원은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계획한 몇 가지 중요한 사업(Grand Projects)중 하나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 라데팡스, 국립 미테랑 도서관, 시트로엥 공원 등과 함께 프랑스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 빌레트 공원은 1983년 ‘21세기를 위한 미래의 공원’ 현상공모에서 젊은 건축가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가 당선된 이후 최고의 건축가(명장)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그는 여러 분야(건축, 음악, 예술, 조경 등)의 전문가들이 공동작업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참여하는, 즉 오감(五感)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공원에 담았다.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이 설계한 음악 도시를 비롯하여, 과학관·도살장을 개조해서 만든 그랜드 홀은 19세기 철골조 건물로서, 철골조가 지닌 아름다움과 기능을 아우르며 전시 및 공연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라 빌레트 공원은 이제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은 물론 과학까지를 포괄하는 프랑스의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다.
얼마 전 화서역 근처에 있는 한국담배인삼공사(KT&G) 수원공장이 민영화에 따른 시설 이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난 무릎을 쳤다. 이곳이야말로 수원의 ‘라 빌레트’가 될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이후 나는 이곳을 수십 차례 돌아보며 꼼꼼히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현재의 건축물을 잘 활용하여 개조한다면, 전시장은 물론 공연장·교육장·체험장 등 다양한 문화공간을 훌륭하게 설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부지 면적은 8만여 평으로 프랑스 라 빌레트 공원의 절반 수준이다. 자연녹지이면서 서북부의 중심에 위치한 지역이라 부족한 도시 기반시설(공원, 녹지 등)만 확충한다면, 동수원권과 더불어 수원의 제2의 문화중심지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재 서북부 지역의 경우 문화시설(전시 및 공연 시설 등)이 변변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만석공원에 자리한 수원 미술관이 갈증을 해소해주기는 하나,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다 보니 규모나 시설 면에서 많은 투자가 필요한 실정이다. 게다가 공연장의 경우는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몇달 전 (사)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를 주축으로 가칭 ‘수원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대단히 좋은 일이라 생각해 나도 서명 운동에 동참한 바 있다. 수십억씩 들여서 미술관을 새로 짓는 것도 좋겠지만, 기왕에 있는 담배인삼공사 수원공장부지를 활용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그래서 개조만 잘 하면 미술관뿐 아니라, 공연장·문화 관련 교육시설·체험장·실내 전시장은 물론이고, 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 등의 공간으로 손색없는 곳이라는 제안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물론 시의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하여 상당한 걸림돌이 있을 것으로 안다. 공익을 앞세워 사유재산의 손해를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하므로, 시의 재정으로 힘들면 도비나 국비의 조달도 생각해 봄직하다. 그러면 우리 수원 시민들도 ‘문화공간 1제곱센티미터 사기운동’을 해서라도 훌륭한 문화유산을 만들고 물려주기에 동참할 것이라 믿는다.
/김동훈 건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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