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거실의 코끼리

1999년 4월 20일 오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 외곽에 위치한 컬럼바인고등학교에서 갑작스런 총성이 울렸다. 기관총을 들고 탄띠를 몸에 두른 고교생 두 명이 학교친구들과 교사를 상대로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이날 1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 그리고 이 두 학생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 짧은 삶을 마감하였다.

원만한 가정에서 성장해 온 조용한 두 명의 고교생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사회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컬럼바인고등학교 총기사건이다. 이 사건은 ‘엘리펀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얼마전 국내에서 상영됐다. 사실 필자는 영화의 내용보다도 제목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엘리펀트라는 영화의 제목은 ‘거실의 코끼리’라는 우화에서 인용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거실에 코끼리 한 마리가 들어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것은 물론 가족 모두가 공포와 무질서에 의해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만약 코끼리가 매일 1㎝씩만 집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면 나중에 코끼리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어도 누구도 코끼리의 존재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TV를 보고 저녁식사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피해학생들에 대한 조사와 교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이들이 록음악을 좋아하고 사색적이었다는 것 외에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한가지 단서가 될만한 사항은 이들이 지역사회와 원만히 연결되지 못해왔다는 점이다. 봉사활동에 참가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인식한다든지 각종 모임을 통해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과정 없이 독립적으로만 성장해 온 것이다.

보호관찰소에서는 매년 4만명에 가까운 범법자들에 대해 사회봉사명령을 집행하고 있다. 사회봉사명령은 과거 자신의 범법행위에 대하여 지역내 복지시설 등에서 갚진 땀을 흘리며 과거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소중한 경험의 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봉사명령 이행자들의 재범률이 현저히 낮을 뿐만 아니라 명령이행을 마친 대상자가 자원봉사자로서 봉사활동을 계속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어 이를 지켜보는 필자도 흐뭇한 심정을 감출수가 없다.

고립되어있는 사회구성원에게 끊임없는 사회통합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 사회도 범죄와 폭력이 없는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다. 사회봉사명령이 그 같은 여정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김종호 수원보호관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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