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와 우리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중지(衆智)를 당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기량의 뛰어남이나 성실함도 단체와 조직이 갖는 일사불란함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비근한 예로 민족의 우수성에서 가장 돋보인다는 이스라엘의 고난사와 팀워크로 세계적 반열에 오른 일본의 근대사를 우리는 비교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개인의 탄탄한 장래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화에 뛰어난 솜씨를 지닌 사냥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산 속을 열심히 헤맨 끝에 큼직한 코끼리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엄청난 그 코끼리를 혼자의 힘으로 마을까지 끌고 올 수가 없음을 알고 우선 마을로 내려와 품삯을 주기로 하고 사람들을 구했다. 간신히 인부들을 구한 사냥꾼은 그들과 함께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앞장서서 코끼리 운반을 시작 했다. 인부들은 많은 품삯을 준다는 말에 흥이 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차 영차 우리 코끼리’ ‘영차 영차 우리 코끼리’ 인부들은 흥을 돋우면서 ‘우리 코끼리’를 끌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냥꾼은 인부들이 땀 흘려 잡은 자기 코끼리를 놓고 ‘우리 코끼리’ ‘우리 코끼리’ 하는데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가 먼저 ‘영차 영차 내 코끼리’ ‘영차 영차 내 코끼리’하면서 자기 코끼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열심히 코끼리를 끌던 인부들이 약속이나 하듯이 일손을 멈추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아무리 독촉하고 품삯을 올려 준다 해도 인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제서야 전후 사정을 깨달은 사냥꾼은 ‘영차 영차 우리 코끼리’ 하면서 코끼리가 자기 것만이 아닌 ‘우리 코끼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사냥꾼의 그 말을 들은 인부들은 전보다 더 열심히 힘을 내서 코끼리를 끌기 시작했다. 사냥꾼의 일화에서 보듯 ‘우리’라는 말은 조직의 협동을 실현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항상 ‘나’보다 ‘우리’라는 단체성을 의식할 때 힘도 배가되는 법이다.

지금 온 나라의 매스컴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억지주장과 역사왜곡에 대한 교과서 채택 문제를 다루며 들끓고 있다. 언론 보도의 민감성과 심각성만큼 우리 국민 개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지 다소 의문스럽다.

일본의 국민성은 나 보다 우리라는 개념에 더 적응되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 국민 각자의 마음이 독도와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얼마만큼 우리라는 개념에 입각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라 생각된다. 독도와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 문제는 우리 존재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강 준 의 용인대 기획심사팀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