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가 나가하루는 1898년 일본에서 태어나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한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종의 합성’ 등 20여편의 주옥같은 논문을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농학자이다. 언뜻 보면 우리와 무관한 뛰어난 한 일본인 학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지만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적극 가담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한국인 우범선이라고 하면 우리와 무관하지 않게 된다. 또 아버지에게 칼날을 세우고 있는 조국에 단신으로 돌아와 조국의 종자자급을 위해 남은 인생을 마치고 조국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더 이상 우리와 무관한 일본인이 될 수 없다. 그는 한국인이며, 그의 이름은 우장춘이다.
일본인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접고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동기에 대해서 그의 제자들은 아버지의 조국에 대한 원죄를 갚겠다는 생각이 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 박사는 일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모금하여 송금한 돈으로 현미경 등 연구 물품을 구입하여 귀국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시민환영대회에서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를 위하여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남은 여생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할 것이고, 뼈를 조국에 묻겠다”고 의연한 각오를 피력하였고, 실제로 1959년 62세로 영면한 후, 그가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며 제자들에게 “종자는 주권” 이라고 교육시켰던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가 내려다보이는 수원 여기산에 잠들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그의 묘비에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 하리라”고 헌시하였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이며, 일본 패망 60주년이기도 하다. 아직 잘못을 뉘우치긴 커녕 일본 극우파의 독도와 야스쿠니신사 망언이 나오고, 친일파 후손들이 자기 선조들의 땅을 법적소송으로 되찾고 있는 이때 우장춘의 인생행로와 업적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수원 서호변,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에서는 10일까지 ‘우장춘박사 일대기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즐거운 휴일 아이들 손이라도 잡고 전시회와 농업과학관 관람도 하고, 바로 뒤에 있는 여기산 묘소도 참배해 보자. 대통령이 불러도 일하는 모습 그대로 찾아가고, 어머니를 못잊어 우물을 만들고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이름 지은 한국인 우 박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강 상 헌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