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의 모토인 ‘평화 번영의 동북아시대’의 건설을 위해 우리 나라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전략적 비전을 제시, 자임한 이후 그 이상과 현실을 두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마디로 “강대국들끼리의 힘겨루기를 수수방관하다가는 옛날처럼 고스란히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앞으로는 절대로 무자비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평화조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정치권과 학계 등에서는 ‘한국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에서부터 ‘국가안보를 담보로 한 과대망상적 모험’이라는 비판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찬성론자는 ‘한미동맹에 바탕하여 등거리 외교가 가능하다’고 보고, 반대론자는 ‘4강국간의 갈등을 조정할 힘이 없을 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의 균형이론을 두고 이러한 비판이론의 입장은 왜곡이며 심지어 자기비하이기하다.
‘균형자’를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세력균형과 균형외교라는 관점에서 특히 후자의 경우 ① 지역협력의 촉진자(facilitator) ② 갈등의 중재자(moderator) ③ 공동번영을 위한 창안자(initiator) 등이 가능하다. 동북의 균형자는 세력균형과 균형외교의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동북아 질서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중국의 중화사상, 미국의 패권경쟁의 정책방향이 충돌하면서 갈등만 증폭되는 양상으로 동북아 구도와 질서를 패권주의로 몰아가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에서 MH의 발언이 나온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자주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존의 안보패러다임에 있어 엄청난 변화를 뜻한다. 지난 50여년간의 안보정책은 사실상 한미동맹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구태를 탈피해 보겠다는 것이다. 유럽은 동맹체제와 다자질서가 공존하면서 화해와 통합의 길로 가고 있는데, 아시아는 과거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갈등만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런 갈등이 심화되면 우리 의사와는 관계없이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동북아질서가 갈등의 질서가 되면 남북통일은 불가능해지고 분단은 고착화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가담하지 않으면서 국익을 최대로 확대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동북아 균형자’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노대통령의 후보시절부터 이처럼 위태로운 지정학적 현황에 그의 오랜 지론이 화학결합을 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균형자론은 “궁극적으로 주변국과의 신뢰를 통해 유럽의 CSCE(유럽안보협력회의)의 다자간 안보체계처럼 동북아지역의 다자간 안보체계구축”을 모색하는 정책이다.
19세기 영국의 국방력에 의지한 균형자가 아니라 경제력과 문화수준, 그리고 역사상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은 평화애호국이라는 명분등 신개념의 연성국력(soft power)의 균형자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국제질서가 힘의 강약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보편적인 가치, 규범 등 무형의 관념의 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천도교(天道敎)의 3세 교주 의암(손병희)은 동경대전(東經大全)에서 삼전론(三戰論-道戰, 財戰, 言戰)을 주창하였다.
일제 강점기 3.1독립선언문에서 “일찌기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였는 데 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전략으로 삼전론의 언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너무 현실을 모른다며 말잔치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보편성만 강조하다 보면 실용외교의 틀을 벗어나 명분론의 위험성에 빠질 위험도 상존한다. 그러나 균형외교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한반도의 균형자적 역할에 더 발전된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노 태 구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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