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자복싱에 열광하는 평양

평양을 다녀왔다. 지난 달 25일부터 29일까지 4박5일의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스포츠행사 참관을 위한 여정치고는 분명 보람 있고 의의가 큰 ‘평양방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평양은 바야흐로 지금 복싱 붐, 아니 여자복싱 붐에 한껏 들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꺼번에 세계챔피언이 3명이나, 바로 그곳 평양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28일 우리 일행은 오후 3시부터 열리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한 시간 전 일찌감치 유경정주영체육관에 도착했다. 질서정연하게 입장하는 관객에 섞여 체육관에 들어간 내 눈은 화들짝 절로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1만 2천명을 넘게 수용한다는 체육관은 스탠드 맨 꼭대기만 더러 빈자리가 보일 뿐, 그 밖의 스탠드는 입추의 여지없이 관객으로 꽉 들어차 있지 않은가. 세계타이틀전마저 텅 빈 체육관에서 치르던 우리다. 어찌 그 광경이 부럽지않을 까닭이 있을까.

예상대로 신생 세계여자복싱평의회(WBCF·회장 박상권)의 3대 챔피언결정전은 북한선수들이 다 차지했다. 북측의 라이트 플라이급 최은순선수는 이본 캐플리스(미국)에게 근소 차로 10회 판정승 왕관을 썼을 뿐, 슈퍼 플라이급의 류명옥은 엘리자베스 산체스(멕시코)에게 2회 TKO승으로, 밴텀급의 김광옥은 모리모토 시로(일본)에게 일방적 판정승을 거둬 당당하게 왕좌에 올랐다.

우리 일행을 긴장시킨 것은 미국선수가 미국국기를 앞세우고 링에 올라왔을 때였다. 그러나 식순에 따라 미국국가가 울러 퍼지는 순간, 링 아나운서의 “모두 일어 나십시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해서 예의를 지켰다. 평양의 변화를 눈여겨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평양의 변화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우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그러했고 유적과 명소에서 만난 안내원의 세련된 한복차림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만경대, 소년궁전, 개선문, 동명왕릉, 지하철 등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도 적지 않았지만 대동강을 바라보며 먹은 옥류관의 냉면 맛은 좀처럼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번 평양행은 남북 프로복싱 교류의 일환에 따라서였다. 한국권투위원회(KBC) 박상권 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탓에 성사됐다. 북한엔 그가 사장으로 있는 평화자동차의 조립공장이 있다. 그뿐인가. 우리 일행이 묵은 보통강가에 자리잡은 ‘보통강려관’호텔도 박회장이 운영하고 있다. 박 회장이 북한에서 가장 신뢰를 받고 있는 기업인 중의 한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북에서 쉽게 문을 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프로복싱은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다. 1992년 프로복싱협회가 창설되었고 이듬해 4월 프로경기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활발하게 운용되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북한의 여자복싱이 다시 불붙은 것은 박상권 KBC회장 겸 신생 WBCF회장의 적극적 추진과 후원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미 2번에 걸친 중국 심양에서의 여자세계타이틀전과 교류전은 바로 이번 ‘평양입성’의 값진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두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물꼬는 터졌다.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남북의 프로복싱 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당장 오는 9월 서울의 교류전이 예정되어 있다. 여자복싱만으로 그치지 않고 남자복싱까지 확대해 갈 것을, 박상권 회장은 거듭 다짐한 바 있다.

/한 보 영 한국권투위원회 부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