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국군포로 송환 서둘러야

또 한해를 맞았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세월의 무상함이다. 아니 인간의 비정한 ‘망각병’ 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를 싸잡아 기억의 저편 골짜기에 내다버리는 짓이 곧 그것이다. 이는 결코 현명한 일일 수 없다.

6·25 전쟁은 두 번 다시 기억하기조차 싫은 아픔이긴 하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엄연한 역사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피붙이간의 전쟁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가급적이면 들추지 않으려고 해왔다. 더더욱 최근 들어서는 ‘이상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6·25를 들먹이거나 그날의 아픔을 이야기라도 하면 마치 민족의 화해를 깨거나 통일을 방해하기라도 하는 듯한 질시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역사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가끔씩 상처난 부위를 밖으로 드러내어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후유증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군포로다. 6·25전쟁 중 북한 인민군과 중국군에 붙잡혀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는 546명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546명!

요즘의 명수(名數)로는 그리 대단한 숫자가 아닐지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외면해 버릴 숫자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이 나라가 풍전등화였을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운 이 땅의 군인들이다. 어쩌다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였고 시대정신에 비겁하지 않은 우리들의 자랑스런 군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포로가 된 이후 낯선 북한땅에서 최하위 계층으로 분류되어 갖은 학대와 노역을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주로 광산이나 통제대상 공장, 집단농장 등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그들 중에는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가족까지 성분 불량자 최하급으로 분류돼 진학이나 사회진출 기회가 제한됐고, 일부는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이혼 당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50년이 넘었다. 50년이라면 반세기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다.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는 일은 얼굴부터 화끈해진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두려움마저 인다.

오늘의 우리들 삶은 순전히 그들의 목숨으로 지켜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락한 사회에서 발뻗고 잠자고, 좋은 음식 먹고,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이 몸 아끼지 않고 요령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싸워줬기에 그 대가로 얻은 전리품이다.

그런 우리가 그 세월을 잊고 우리만 잘 살면 되는 것인가.

대국을 자처하는 한 나라는 자기나라 군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정부가 나서고 그렇게해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찾았다 하면 그 나라 국기를 덮어 정중히 모셔가는 것을 여러차례나 보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국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우린 새삼 깨달았다. 국가의 존재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이 국가인 것이다. 국군포로 송환은 이제 더 늦출 수 없는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남북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북한 사회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쉬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당당히 테이블에 올려 송환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북한 당국도 더 이상 국군포로 문제를 기피하거나 ‘북한에는 단 1명의 국군포로가 없다’는 식의 억지주장을 펴지 말고 민족적 인륜적 차원에서 앞장서 해결해야 마땅하다. 그것만이 진정한 남북관계 개선이며 민족 화해라고 할 것이다.

/윤 수 천

동화작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