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보면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한평생 바다에서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대어를 낚기 위해 거친 파도와 바람과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데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의 여정이었다.
햇빛과 바람과 시간과의 힘 겨루기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징글맞게 돋아나는 잡초를 뽑아내고 신종 병균과 벌레와 쉬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며 농작물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잠을 줄여가며 고된 노동을 기울인 자신의 땅을 지키는 일이란 외로움과 고독과의 싸움이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금 우리는 가스나 원유, 철금속 같은 에너지 확보에만 온갖 신경을 쓰지만 미래 자원인 식량이나 농업 등에 대해선 낙천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듯하다. 도시 소비자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 눈에 보이는 흠 없는 상품과 가격에만 관심을 갖지 농촌의 현실에는 무관심하다.
농촌인구는 고령화돼 가는데 농사짓는 일을 기피한다면 미래에는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 모든 식량 자원을 외국에 의존할 수는 없다. 외국으로부터 들여 오는 값싼 농작물을 아무런 고민 없이 받아 들였다 나중에는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일은 삼척동자도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의 밀과 보리 농사가 사라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가격이 계속 올라가도 ‘울며 겨자 먹기’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된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데도 시정되지 않는 건 눈 앞의 이익에만 급급해하는 근시안적 사고와 무관심 때문이다.
어릴 적 필자가 살던 마을에는 유난히 봇짐장수가 많았다. 먼 남쪽 바다에서 나는 김, 멸치, 미역, 다시마 같은 마른 해산물을 팔러 골짜기 깊숙이 틀어 박힌 마을까지 찾아오는 아주머니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밥 먹을 시간에 그들이 문을 두드리면 어머니는 안방으로 불러 들여 수저를 건네고 마땅히 밥 사먹을 장소나 형편이 부실한 그네들은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며 바다 이야기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 줬다. 비릿한 바다 냄새, 해초 냄새가 방안에 퍼지면 나는 먼 바닷가 마을에 대한 이상한 끌림을 갖게 되고 그 아주머니를 은연중 기다리게 된다.
예전에 농촌은 사람에 대한 정과 자연에 대한 소박한 마음이 어우러져 살았다. 이러한 정경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유산이자 휴머니즘이며 동양적인 가치다.
그러나 농촌 현실도 달라졌다. 사람의 정과 자연에 기대어 산다는 게 더 이상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기계가 부족한 일손을 대신하고 주택의 구조도 도시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겉으로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다. 그러나 농촌의 삶이 예전에는 자연과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었다면 지금은 밀려오는 수입농산물과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짐이 더 얹어졌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햇볕과 바람과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는 일일뿐이다.
가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가 가난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건 그들의 고유 식량 작물을 버리고 제국주의가 심어 놓은 커피생산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커피를 팔아 식량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애써 땀 흘려 농사지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그들은 농업을 포기했고 오로지 커피 농장에만 힘을 기울인 결과 이제 커피 값은 하락하고 식량 농사는 다시 지으려 해도 힘들게 됐다.
농촌은 현대인의 영원한 고향이며 정신적으로 기댈 언덕이다.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유 시 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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