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서 행위능력이 있는 행위주체는 자연인과 법인 둘로 나뉜다. 자연인은 사람 개개인을 말하고, 법인이란 여러사람이나 일정재산을 모아서 만든 조직이 법률이 정한 요건을 충족시켜 하나의 인격을 취득한 것을 말한다. 법인은 다시 영리성을 기준으로 영리법인과 비영리법인으로 나뉜다. 영리법인의 대표적인 것이 주식회사이고, 비영리법인의 대표적인 것이 학교법인이다. 오늘날에는 법인이 흔하지만, 법인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19세기 초 만해도 유럽의 왕들은 국제무역, 운하나 도로, 건설 등 공익적 목적을 위해 극히 예외적으로만 특별법을 제정하여 법인을 인가하였다. 큰 자본이 소요되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유한책임과 조세감면이라는 특혜를 주어 대규모 자본을 동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언론이나 방송을 보면 종종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다. 기업은 본래적 책임을 수행하면서도, 덤으로 사회적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법인 발생의 역사적 맥락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법인은 본래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별도로 가지고 있지 않다. 본래적 책임이 곧 사회적 책임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기업들에게 문화 같은 경제외적 분야에서의 공헌 같은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업은 본래목적인 경제활동을 잘하면 사회적 책임도 다하는 것이다.
기업 경영자들 중에 경영과정에서 죄를 짓거나 비행을 저지르고 이것을 속죄하기 위해서 막대한 액수의 사재를 출연하여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법인경영에서 잘못을 저질렀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액을 변상한 다음 경영에서 물러나면 된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사재를 털어서 사회에 공헌한다고 하는데, 그 사재는 과연 정당하게 축적되었을까? 만일 법인경영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러 축적한 재산이라면, 그것은 해당법인으로 귀속되어야지 사회일반으로 지출되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이런 와중에서 해당 부정경영자가 사회에 무슨 큰 기여라도 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한편, 사립학교 경영자들은 사유재산권 이론을 내세워 개방형이사의 도입을 규정한 개정 사립학교법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 또한 법인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일단 사재를 가지고 학교라는 공익적 목적의 비영리법인을 설립하여 국가의 인가를 받았으면, 그 재산은 사재(私財)가 아니라 이미 공재(公財)이다. 사유재산권을 주장하려면 학교라는 비영리법인을 설립하지 말았어야 한다. 공익적 목적을 위해 재산을 쓰겠다고 출연하고 사유재산권을 주장하는 것은 극심한 자기모순 아닌가? 국가도 법인이 공익적 목적을 수행하니까 세금도 면제해주고 각종 혜택을 주는 것이다. 사유재산처럼 운영하려면, 먼저 국가와 법률이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 떳떳한 태도일 것이다.
법인이란 국가가 일정한 공공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연인이 아닌 행위주체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그것의 목적달성 행위를 돕기 위해 유한책임이나 조세감면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법률적 사회목적 달성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인의 자유 및 권리는 국가와 법률에 의해 정해질 수밖에 없다. 국가와 법률은 법인의 모태이다. 그러므로 법인경영자들이 기업의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내세워 국가와 법률에 도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역으로 사회가 법인들에게 본래 기능을 넘어서는 과도한 사회적 공헌을 기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하 태 수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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