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의 화성이야기/<17>채제공과 금등(金謄)

채제공, 사도세자 폐위 목숨걸고 반대…“진정한 충신이요 아버지 같은 존재”

지금은 대스타가 된 조재현이 연극 ‘에쿠우스’의 주연 알렌 역을 마치고 영화계의 손짓에 화답해 처음으로 찍은 영화가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이었다. 그가 맡은 배역은 이인몽이란 정조의 총애를 맏는 젊고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이 영화는 정조에 안성기, 정약용에 현재 문화관광부 장관 김명곤, 그리고 한국 최고의 여배우 김혜수가 이인몽의 처 상아 등으로 등장했다. 당시 ‘영원한 제국’ 토대는 당대 빅 히트를 쳤던 이인화 소설. 약관의 나이에 천재적인 글 솜씨를 보인 이인화의 소설 기법은 그가 모방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보다 한수 위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인화 소설을 통해 “정조가 노론의 계략에 끝내 죽음에 이르렀고 정조의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소설의 중심 내용이었던 ‘금등(金謄)’을 정조가 찾았다면 정조도 죽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말하자. 정조는 실제 정권을 교체할만한 위력을 갖고 있는 금등을 소지하고 있었고 그 금등을 1793년 8월 공개했다. 그렇다면 금등이란 무엇이고 정조는 왜 그것을 공개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금등의 공개가 화성 축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남인의 영수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었기 때문이다.

1793년 1월 정조는 3년여동안 좌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했다. 자신이 훗날 임어하며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를 열 새로운 땅 화성으로 그를 보낸 것이다. 그만큼 신도시 화성은 중요했고 성곽 축조의 기반을 채제공이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새로운 고을의 수령으로 보낸 것이다. 채제공이 누구인가. 그는 우리들이 아는 대로 남인의 영수였다. 그러나 정조에겐 단지 자신을 지지하는 당파인 남인의 영수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자신의 신하이지만 그는 채제공을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음에 이르자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조가 돌아가신 건 채제공과 정조와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채제공은 1720년생으로 23세 나이로 문과 정시에 합격했다. 조선시대 41세가 과거시험 합격연령이니 23세면 참으로 빠른 나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인 출신인 그가 이처럼 빠른 나이에 합격한 건 1차적으로 그의 학문적 역량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노쇠로 대리 청정하던 정조는 채제공에게 “경과 같은 자라면 마음에 기댈 수 있을 것이 있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절대적인 신뢰인가! 이는 단순히 신뢰의 차원을 넘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함께 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말을 한 후 정조는 30여년 뒤 채제공과 더불어 금등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1762년 윤 5월13일. 이날은 조선왕실 최대 비극이 시작된 날이다. 이날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그가 거부하자 뒤주에 가뒀다. 이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영조에게 “세자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한 이가 채제공이었다. 이미 채제공은 4년 전 영조가 세자를 폐하고자 했을 때도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남인 출신으로 도승지에 올랐던 그는 사도세자 죽음에 눈을 질끈 감으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평안함이 있었겠지만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간청한 그의 목소리는 영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윤 5월21일 사도세자가 죽자 그날 밤 영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노론의 이야기만 듣고 경솔하게 자식을 죽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오직 자신에 대한 진정한 충신은 오로지 채제공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정신을 차린 영조는 궁궐 밖으로 쫓겨난 세손을 급하게 불러 들이고 사도세자 죽음에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인 채제공도 불러 들였다. 세자가 죽은 그날 밤 구중궁궐 깊은 곳에 영조와 세손 그리고 채제공 셋만 앉아 있었다.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야 하는 사관마저 내보낸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노론의 거두 김상로가 너의 진정한 원수이고 아비를 죽인 장본인”이라고 일러줬다. 그리고 “세손의 진실된 충성스런 신하는 바로 채제공”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5년 전부터 김상로가 이 사건을 준비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도 잘못이 없고 자신도 잘못이 없었음”을 글로 남겼다. 사도세자 죽음은 노론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밝힌 충격적인 대목이다. 이 내용이 바로 ‘금등’이었다. 쇠줄로 봉한 궤짝인 금등은 ‘서경’중 한편의 이름이다. 주나라 무왕이 병들자 주공은 태왕(太王)·문왕(文王) 등 조상들에게 “자신이 대신 죽을테니 무왕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고는 그 기도문을 금등안에 넣어 보관했다. 성왕(成王)이 즉위한 후 관숙·채숙 등은 주공이 조카 성곽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을 퍼뜨려 성왕이 주공을 의심했는데 비로소 금등을 꺼내 본 성왕이 주공에 대한 의심을 풀고 돌아오게 했다는 내용의 고사이다. 이 금등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뜻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는 말로 변하게 됐다. 영조는 사실 “사도세자가 평양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제거할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는데 비로소 세자에 대한 의심이 풀어진 것이다. 또한 과거 자신이 아팠을 때 세자가 “자신이 대신 죽을테니 부왕을 살려달라”고 빌었던 사실도 기억했다. 그러니 그가 아들을 죽인 게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한편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붙인 김상로·홍인한 등 노론에게 얼마나 큰 한이 맺혔겠는가. 어쨌든 이 금등이 훗날 공개됐을 경우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일대 타격을 입을 것이며 정권 교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조는 정국에 혼란이 다시 생겨선 안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첫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 위패 아래 보관하게 했다. 이 사실은 그날 밤에 모인 세사람만의 비밀이었다.

문제는 정조가 이 금등을 공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점이다. 1789년 수원부읍치를 옮긴 이후 노론에선 “전하의 의도가 무엇이냐”며 공공연하게 정조를 압박했다. 특히 1793년 1월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된 후 노론의 불안은 가중됐다. 이들은 화성에 ‘장용영외영’이란 최고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대규모 국영농장과 상업기반 등이 들어 서는 것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만일 이곳에 성곽이라도 쌓아 올린다면 이 도시는 천하 그 어느 누구도 공격할 수 없는 도시가 될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만일 이곳을 기반으로 자신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공세를 펼친다면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화성유수부 축성만큼은 막아야 했다. 정조가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정조 역시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 깊은 고민 속에 나온 게 바로 고육계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고육계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신하를 희생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화성유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숙종대 장희빈의 죽음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이란 수상(首相)의 자리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영의정에 오른 채제공은 사도세자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했고 그의 죽음에 대한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정국은 소용돌이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남인과 노론 모두 이 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영원히 조정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노론의 영수인 좌의정 김종수는 “한 하늘 아래에서 채제공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조는 이들의 전쟁을 지켜 보며 영의정 임명 10일만에 채제공과 김종수 모두를 삭직시켰다. 그리고 8월8일 정조는 채제공을 변호하며 그가 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밝히고자 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승지에게 영조가 직접 쓴 금등의 일부 구절을 쪽지에 적어 대신들에게 보여 주게 했다.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란 구절은 세자가 영조가 아플 때 대신 죽기를 바랐다는 내용이 담긴 것이고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노라”는 사도세자가 살아 돌아 오길 바라는 영조의 마음이었다. 왕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의 통곡이 정전을 가득 메웠다. 노론으로선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노론의 잘못을 선포하고 국청을 차린다면 자신들의 당은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된 일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노론도 더 이상 화성 축성과 관련해 시비를 걸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이로써 화성 축성에 대한 반대는 사라졌다. 정조는 금등 공개 이후 몇달 지나지 않은 12월 채제공을 화성성역 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사도세자의 깊은 한을 알고 있는 자신과 채제공 그 두 사람의 마음으로 화성을 축성하고자 한 것이다. 국왕 정조가 믿는 절대적 인물이 그였기에…. /수원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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