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즐거움을 주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이다. 물 흐르는 소리, 천둥 번개 치는 소리, 빗방울소리, 풍경소리, 북소리, 바람 소리…. 이런 소리들은 녹음해서라도 가끔 듣고 싶은 소리이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신선한 소리를 신문에서 보게 됐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작된 ‘안아드려요’ 운동이 국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운동은 2년 반 전 ‘후안 만’이란 청년이 시드니 거리에서 ‘안아드려요(Free Hugs)’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포옹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도 따갑고, 경비원들에게 쫓겨나기도 했다”고 어려움을 밝혔지만, 포옹한 후에는 정말 감동적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 서로 사랑하고 웃고 행복해 하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학교폭력, 왕따, 결손가정, 이혼가정 등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콘크리트화돼 가고 있는 모습들을 본다. 우리 사회, 특히 우리 자신들은 이러한 메마른 사회 속에서 물질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힘의 논리에 따라 흘러가고, 힘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의 삶이 맑은 공기가 그립듯 서로 나누고, 포용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회가 그리워진다. 그런데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사를 읽은 것이다. 스킨십을 통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몸과 마음을 나누는 운동, 서로에게 다가가는, 의미 있는 운동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동양적 사고 속에 사는 장년층의 우리는 ‘안아준다’는 게 참으로 어색하고 부자유스럽다.
주위를 둘러보면 서로의 관계들이 영양 결핍된 아이처럼 허약하다. 젊은 기성층은 내면조차 컴퓨터 속으로 온종일 떠돌고 있다. 기계음을 만들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양·애정결핍을 치유하는 길은 존재적 차원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안아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병원 진료실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의사는 환자의 눈을 마주보면서 시진과 촉진, 문진 등으로 환자의 질환을 읽어내는 건 전설이 됐다. 기계적인 장치들이 온갖 자료를 제공, 따뜻한 의사의 손이 환자를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기계들이 환자의 몸을 살피고 있다. 최신 시설과 의료기기 등을 자랑하면서 기계들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건조한 세상 속에 몸으로 만이 아닌 마음과 정신까지도 서로에게 다가서는, 안아주기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병원에서도 아픈 이의 육체적 지지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안정과 나눔의 전인적인 차원의 ‘안아드려요’ 운동이 일어나길 희망한다.
/차영미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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