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며

차영미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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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보내며 참으로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됩니다. 박노해님의 ‘해거리’라는 시를 떠올려 봅니다. 부족한 가운데도 실하고 단맛을 내는 열매들을 풍성히 맺길 바라는 우리네 마음속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슴 한켠을 뭉클하게 하면서 속내를 들켜 부끄럽게 하고 자성을 하게 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늘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늘 닮은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온통 허망한 것들에 걸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신·물질적으로 넘치게 끌어안고 빈 껍질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열매 맺기를 이웃들에게 강요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해거름으로 충분히 힘을 모아야 열매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물이나 열매가 없으면 쉽게 원망과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며 배고픔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상들은 해거리를 잘 살아 온 민족, 당장 충족되지 못해도 기다릴 줄 알고, 희망을 하늘에 두고, 정성을 기울인 민족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희망보다는 절망과 결핍에 울거나 방황하는 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정직한 해거리를 잘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에 뿌리 내리고 사는 감나무에 감이 늘 풍성히 열리길 기대하면서 손놓고 있습니다.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살피기에 너무 게으릅니다. 새해에는 부디 해거리를 잘 살기 위해 땅심과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감나무에 하얀 눈꽃들이 소복이 피어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흰빛으로 변해 보이는 모든 세상이 동양화 화폭 속에 설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튼튼한 뿌리와 땅심으로 새해에는 희망의 열매를 키우는 좋은 날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시인의 해거리를 옮겨보았습니다.

“그해 가을이 다습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 당가? 응 해거리 하는 중이란다./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 부려서/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지켜봐야 하는 법이란다./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정직하게 해거리를 잘 사는 게 미래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차영미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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