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배우고 때로 익히니)’로 시작돼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노여워하지 않으니’로 마무리된다. 배움이 어찌 학교에서의 교육뿐이겠는가. 공자는 학문의 최고 목표를 예(禮)에 뒀다. 요즘 그 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논문 표절은 물론 제자의 작품까지 도용하는 실례(失禮)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당연히 배움이란 지식은 물론 인격까지 포함돼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배울만큼 배웠고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 해도 너무한 서글픈 연극들을 연출하고 있다. 연초 빗재가마 김용문 도예가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김에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시의 공자 묘를 답사했다. 처음에는 3칸 방의 소박한 공간이었다는데 각 왕조별로 거듭 증축, 세계 최대 개인 유적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최근 후진타오가 집권하면서는 사회주의 반동이라며 퇴출했던 2천500년 전 공자를 복권시켰다.
오산에도 공자를 모시는 공묘가 있다. 논산 노성에 있는 것과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 하나인 귀중한 향토유적이다. 조선 중종 때 개혁정치가 조광조와 친구이며 경기감사와 대사헌 등을 역임한 공자의 후손 공서린이 있다. 그가 낙향해 후진을 양성하던 서원이 바로 오산 궐리사이다. 그는 마당 은행나무에 북을 걸고 제자들이 학업을 게을리 할 때마다 북을 울렸다고 전한다. 필자는 10여년 전 그 은행나무를 소재로 ‘북소리’란 연극대본을 쓴 적도 있다. 지금도 그 곁을 지나칠 때면 그 옛날의 큰 북소리가 두둥둥 울리는 듯하다.
오산은 아주 좁은 면적과 적은 인구가 사는 작은 도시지만 갖출 건 골고루 갖추고 있다. 시내 한복판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오산천과 온갖 나무들의 천국 물향기수목원, 개발이 진행 중인 금암동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지석묘도 있다. 권율장군이 기지로 승전했던 독산성과 세마대 등도 있다. 이뿐인가. 공자의 궐리사를 비롯, 해동공자 최충의 문헌서원, 청해백 이지란사당, 충신 이상재 정려각, 최정린 효자 정려문 등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충·효·예(忠孝禮)의 민족정서를 배우고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이원규 테마기행예술제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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