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찻잔을 접하면서 청자나 청화백자와 같이 겉이 매끈하고, 아름다운 학이나 구름이 그려져 있어 선뜻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닌 투박하고 거친 막사발이 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茶會를 주관하는 일본 차도선생이 투박한 찻잔을 너무나 소중히 다루는 것같아 그 까닭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그 선생이 설명하는 조선찻잔에는 그러한 대접을 받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을 정도로 많은 의미와 가치가 담겨져 있었다.
조선찻잔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도자기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청자나 백자는 어린아이가 입은 알록달록한 색동옷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성숙된 어른은 결코 색동저고리 같이 화려한 색상이나 그림이 있는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도자기를 계절로 비유하면 청자나 백자는 화려한 봄으로 비유할 수 있지만 분청다완은 쓸쓸하고 고적한 가을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계절 중에는 봄보다 가을이 성숙된 것이며, 계절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도 가을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도를 함에 있어 있어서도 깨끗하고 화려한 청자나 백자찻잔보다는 외관적으로 비록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단순한 차를 마시기가 아닌 다도를 함에 있어서는 분청다완이 더 격조가 있고 어울린다는 것이다.
도를 닦는 스님은 결코 세인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거나 화려한 그릇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인이나 지적 성숙도가 낮은 사람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찾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비록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정신적인 존경을 받았다. 성철스님이 만약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었다면 과연 그토록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니까 화려하고 기교적인 미는 세속에 가까운 것이고, 자연스럽고 소박한 미는 도를 생각하는 성숙된 가치에 가까운 것이다.
조선찻잔은 청자와 같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기교를 부리지 않아 가식이나 거짓이 없다. 無心無作(무심무작)의 아름다움, 아름다움(美)이나 추함(醜)을 초월한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즉 조선다완에는 가장 자연스러운 진실미가 담겨져 있으며, 이러한 예술에서의 진실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예술미의 최고의 기준이 될 것이다. 조선다완은 바로 이러한 내면적 예술미의 핵심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아닐까.
/윤준식 신협중앙회 인천경기지역본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