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몇몇 또래 아이들과 동네에 찾아온 서커스를 보기 위해 대형 천막 근처를 기웃기웃했던 지난날이 한낱 추억으로 남는 것일까. 한수산의 ‘부초’에서 보여지는 모습처럼 모든 서커스는 동춘서커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설날이 되면 TV에서 보여주던 서커스가 한참 봇물 터지듯 나온 평양교예단이든 중국기예단이든 말이다.
요사이 서커스로 떨치고 있는 캐나다. 원래 캐나다에서 서커스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캐나다는 서커스의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서커스와 연극적인 요소를 뒤섞고 서커스와 멀티미디어를 결합하며 서커스에 사용하는 음악 또한 아프리카 음악부터 최근의 미디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가히 대단하다. 그리고 그 음악에 춤을 넣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서커스에 인간이 가진 본연의 몸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영감의 툴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 통념을 깨고 예술이라는 것을 내 식으로 표현하는 몸. 그 즐겁고 유쾌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레인(Rain)’이 비교적 소규모로 감수성이 있고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연극적인 서커스라면 똑같은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는 신개념의 복합적요소를 가미한 비경계 서커스인 셈이다.
인간의 몸둥아리를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맞추는 꼴이 인간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육체의 모습이라면, 인간의 몸을 가학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 이상, 서커스란 긍정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몸’에 대한 표현의 양식을 무용이든, 그 또 다른 표현의 공연양식으로 나타날지라도 지난 10여년동안 ‘몸’에 대한 담론은 제대로 된 실체를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요즘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과시적 세태 속에 빚어진 몸은 예술적으로 승화된 인간 내면을 지향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몸에 대한 왜곡된 모습으로 반영된다.
연극으로 보여주는 배우가 작가의 구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반면, 연출에 의한 보여주기식, 혹은 의도된 것이 한낱 쓸모없이 낭비되는 육체의 모습으로 탐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몸에 대한 많은 이견 속에서 그래도 몸은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서 존엄받는 일종의 절대적인 메시아처럼 다가오도록 한 게 서커스다. 그저 기예에 머무르는 수준이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력과 정서를 담아내는 연극적 서커스가 각광받기에 그런 것 같다. 본래 연극이란 철학적인 인간적 내면을 표현하는 작업이 아닌가. 그러기에 지난해부터 부각되고 있는 서커스가 그렇다.
지난해 7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여 준 서크 엘루아즈의 ‘레인’은 정말 하나의 빗줄기처럼 나의 몸에 부딪혀 흠뻑 옷을 젖은 상대방을 보면서 서로 황당함이 아닌, 깔깔 웃는 즐거움을 가져다 줬다. 아주 즐겁게 유쾌한 비를 맞은 연극적인, 몸이 된, 서정적인 내가 된 것이다. 그것은 내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모험이며 행복한 몰입이다. 이 정도라면 어린이처럼 따라하는 흉내내기 몸동작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규찬 공연기획자 수원장안구민회관 프로그램운영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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