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년대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진풍경 중 하나는 도시락 검사였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도시락 뚜껑을 열도록 한 다음 보리밥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를 검사했다. 쌀과 보리의 비율은 7대 3을 원칙으로 했는데 보리의 알이 굵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거의 5대 5로 보여야 했다. 보리를 섞어 오지 않은 녀석들은 보리가 많이 섞여있는 친구의 도시락에서 보리를 한톨 한톨 빌려와(?) 자기 도시락에 적절히 ‘배치’해야만 했다. 보리혼식과 분식을 권장하는 현수막, 표어, 포스터 등은 곳곳마다 걸려있었다.
이 시절 쌀로 막걸리나 밀주(密酒)를 빚어 마시다가 걸렸다가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모두 쌀 절약의 일환이었다. 쌀에 대한 우리 세대(60대 전후) 농업인들의 단상(斷想)이란 우선 ‘치열함’이다. 쌀 자급과 쌀 생산 확대는 전시 작전같은 지상명제였고 국가적 아젠다였기 때문이다. 쌀이 한반도에 도입된 이래 누(累)천년 동안 우리 민족이 언제 쌀밥 한번 푸짐하게, 걱정 없이 먹어본 적 있었던가. 상하(常夏)의 기후조건으로 이모작이나 삼모작이 가능했던 동남아와는 달리 우리 같은 동북아는 그저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 님’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천수답(天水畓)이었기에 풍흉(豊凶)은 팔자소관이었고 배고픔과 영양부족 등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70년대초 박정희 정부가 쌀 생산 증대를 위한 녹색혁명의 일환으로 통일벼 보급 사업에 전력 투구할 때 많은 농업인들은 반신반의의 심정을 가지면서도 정부를 믿고 국가적 시책을 충실히 따라줬다. 통일벼 사업 성공은 쌀 자급이란 ‘당시로선 못해낼 것 같았던’ 벅찬 과제를 이뤄내는 시금석이 됐다. 쌀 생산 확대와 더불어 우리 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초고성장을 이뤄내기 시작했다. 실로 족쇄처럼 안고 살았던 ‘만성식량부족’을 타파해 나가면서 우리 국민들은 자신감과 성취감 등을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은 전(全) 산업분야의 심리적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필자는 감히 자부하고 싶다.
우리 쌀 수출이 가시화됐다. 고양 덕양농산 쌀이 스위스로 곧 수출될 예정이고, 일본에 초밥용 쌀을 수출하고 있는 안중농협도 러시아 시장에 곧 진출한다는 소식이다. 우리 쌀은 유전자변형작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이 아니기에 유럽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쌀이 드디어 해외까지 나가게 됐다. 스위스로, 러시아로 가는 쌀이 선적될 때는 새삼스런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박용철 한국농촌지도자 경기도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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