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라는 행위는 박물관과 함께 19세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발견이며, 이 전시 행위의 확장된 형태인 만국박람회는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크게 성공한다. 만국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산물을 전시해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으나, 문학만큼은 아니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결산 보고서는 “문학은 만국박람회 프로그램에 포함되지도, 포함될 수도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2년 빅토르 위고 박물관이 설립되는 등 문학과 전시예술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됐으며,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공식 프로그램에 ‘문학 박물관(Musee de la litterature)’이라는 이름의 문학 전시회가 드디어 포함된다. 이 ‘문학 박물관’은 1937년 만국박람회가 거둔 가장 놀라운 성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예술을 이렇게 대중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논쟁은 만만찮았다. 결국 이 논쟁은 독자가 아닌 대중의 관점에서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이 모색됐을뿐 아니라 그 대중들이 작가들의 내밀한 창작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성과를 남겼다. 그 이후 오랜 동안 작가의 삶과 창작의 자취들을 전시해 온 고전적 형식의 프랑스 문학관들은 최근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이나 순수 문학 활동보다는 문화 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아라공문학관장은 문학관을 ‘문학과 독서, 책, 그리고 문화와 예술에의 접촉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신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들이 이뤄지는, 대중들에게 열린 모든 공간’이라고 정의했다.(윤학로·김점석의 논문)
우리나라 문학관을 살펴보기에 앞서 문학정책들을 잠깐 돌아보자. 우리나라 문학정책들은 창작과 독서 행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둬 왔으며, 그마저도 공급자적 관점을 벗지 못했다. 그러께부터 광범위하게 펼치고 있는 우수 문학작품 보급사업도 ‘얼마나 잘 읽었는가’보다는 ‘얼마나 많이 뿌렸는가’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다. 이제 문학정책들은 창작 발표 지원, 독서 기회 확대 등과 같은 전통적 방식 위주에서 탈피해야 한다. 시각예술이나 공연예술의 경우 마땅히 그러할 수밖에 없겠지만 박물관·미술관, 공연시설 등을 통해 대중들과 만난다. 여가 생활 기회의 확대, 디지털 환경의 변화 등은 가만히 앉아 하는 독서 중심의 문학 향수를 쉽지 않게 만들었다.
1992년 부산에서 문을 연 추리문학관부터 지난 9일 개관한 목포문학관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문학관 수는 통틀어 40곳이 안 된다. 일본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1997년부터 중앙·지방정부의 문학관 건립지원정책이 펼쳐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문화부문 시설인프라 조성정책의 중심이 60~70년대 지방문화원, 80~90년대 문예회관, 90년대 이후 문화의 집 등이었다면, 이제는 문학관이다. 생산(창작)이든 소비(독서)든 ‘닫힌 곳’에서 ‘나 홀로’ 한다는 특성을 지닌 문학에 하드웨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문학도 열린 바깥으로 나가 대중들에게 보여지면서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상이 됐다. 그 열린 바깥에는 문학관이 있다.
조선왕조 500년 이상의 도읍지와 현재의 수도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는 그 예술적 업적을 길이 보존할만한 숱한 문인들이 나고 스러진 지역이다. 그러나 문학관은 운영 중인 곳이 2곳(조병화문학관 만해기념관), 계획 중인 곳이 2~3곳 정도뿐이다. 박물관 86곳, 미술관 23곳, 문예회관 22곳, 문화의 집 18곳 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프랑스처럼 문학관은 이제 ‘문학을 넘어 문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제2세대 문학관’(프랑스 쥘베른문학관장)의 이념은 우리 문학의 한 지평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문학을 즐기는 방법에 책 읽기 이외의 다른 수단이 있음을 인정하고, ‘책 밖’으로 나가자. 문학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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