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정치는 탁월한 지휘다

박상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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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던 즈음의 실화다. 어느 정부 산하 기관의 장이 바뀌었는데, 그는 새 정부와 정치적으로 유사한 배경과 이념 등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인품이 넉넉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는 분이었다. 그가 취임한 지 하루 이틀이나 지났을까? 그와 오랫 동안 ‘민주화’ 등을 위해 함께 활동한 한 사람이 그 산하 기관의 모 간부에게 심한 불평을 토했다. 어떻게 기관장으로 하여금 직접 계산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 자신을 포함한 몇몇 인사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법인카드를 내미는 그 기관장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는 것이다. 마땅히 간부나 비서가 기관장을 수행했어야 한다는 투의 말도 이어졌다.

얼핏 듣기에 이 말은 적절한 듯하지만 이를 전해 듣는 직원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관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고는 기관장의 개인적인 품위 유지나 업무 추진을 위한 자리에 식대 따위를 계산해 주는 직원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이미 ‘권위주의’를 벗고 ‘민주화’된 조직이었다.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참을 수 없다면서 언죽번죽 너도나도 한 마디씩 말을 보탰을 그 자리는 참 우울한 개그였다고나 할까. 다음 대통령 당선인은 올챙이 적 생각을 잊은 개구리들의 몽매한 개그에 좌지우지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5년이나 10년 동안, 아니면 그 이전부터 변함없이 떠받들어져 온 가치와 문화가 얼마든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늦가을 필자는 주례를 섰는데, 첫 주례라 걱정이었다. 긴 고민 끝에 아내에게 해주고 싶었으나 못한 것들을 골라 주례사에 담기로 했다. 왜 그리도 할 말이 많아지는지…. 그날 저녁 아이가 그랬다. “그럼, 아빠. 주례 많이 해야겠다.” 순간 세 식구는 크게 웃었지만 그 말의 울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흔히 남들이 못 한 것을 하려 애쓰지만 실은 내가 못 한 것을 찾아 하기가 더 어렵다. 다음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들이 지적한, 자신의 약하거나 부족한 점, 다르거나 틀린 점 등에 특히 귀를 열고, 즉 잘못했거나 미심쩍어 하는 것들을 찾아 채우고 고치고, 또 실천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말이다.

구랍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경기필하모닉 송년 음악회를 감상했다. ‘위대한 교향곡의 명악장’이라는 주제로 전혀 별개인 네 교향곡의 1개 악장씩 연주된 2부가 압권이었다. 베토벤의 제5번 1악장, 차이코프스키의 제4번 2악장, 드보르작의 제8번 3악장, 브람스의 제1번 4악장 등을 하나의 교향곡처럼 이어서 듣게 된 것이다. 지휘자 금난새는 연주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첫 시도라며 그 특유의 재치로 넷을 한데 묶은 뜻을 설명했다. 네 작곡가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브람스는 “베토벤을 존경하는 자신의 곡이 그의 곡과 함께 연주되니 영광이다”, 드보르작은 “자신은 브람스의 친구니까 괜찮다”, 차이코프스키는 “아름다운 2악장이니까 좋다”면서 다들 허락했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전화를 안 받더라는 말로 청중들을 웃기면서 연주는 시작됐다. 한 작품처럼 느껴질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워낙 유명한 곡들이어선지 결코 한 작품일 수 없었다. 조금 실망할 수밖에.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와 여러 번의 커튼콜이 이어질 때 비로소 한 작품이기를 바랐던 마음이 혼자만의 착각이나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다 다른 것들이 한 자리에 어울려 존재한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1-2-3-4악장이라는 교향곡의 기초 질서 속에서 나름대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들에게 한 목소리나 일방적인 가치를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작곡가와 그 음악, 여러 연주자와 그 연주 등을 모두 숭상하며 조화와 통합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위대한 정치는 탁월한 지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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