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문화부장관 내정자가 발표됐다. 유인촌 문화부장관 내정자는 문화정체성을 강조하고 국가브랜드 확립에 주력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유인촌 내정자가 영화감독 이창동, 연극인 김명곤에 이은 세 번째의 예술인 출신 장관이라는 게 화제거리다.
그러나 문화부장관이 예술인 출신이건, 교수나 행정인, 혹은 정치인 출신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문화부장관의 소임을 훌륭하게 치러낼 수 있는 경륜의 소유자인가 하는 점이다. 예술인 전력을 가진 분은 문화예술현장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남 다를 수 있다. 교수 출신은 해박한 식견으로 문화정책의 밑그림을 잘 그려낼 수 있다. 행정가 출신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조직관리능력으로 효율적인 국가 목표 달성에 유능할 수 있다. 정치인 출신은 지역·세대·계층간 갈등 조정과 국민적 합의 도출에 상대적으로 강하다 할 수 있다.
문화부장관의 소임은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하고, 문화예술의 향기 넘치는 건강하고 품격 높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이같은 소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현장 감각, 탁월한 정책 기획능력, 균형과 조화를 아우르는 행정경험, 갈등과 위기국면을 헤쳐나갈 정치력,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이같은 조건들을 어느 정도 상당한 수준으로 충족시키는 경우 우리는 높은 경륜의 문화부장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문화부장관의 경륜은 정책으로 가시화된다. 경륜이 높을수록 예술가들이 예술창조에 매진할 수 있게 하고, 일반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생활 가운데 향유할 수 있도록 정책을 고안하고 시행한다. 그래서 높은 경륜의 문화부장관은 각기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나름대로의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족적을 남긴 장관들을 현재의 잣대로 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의 현주소는 어쩔 수 없이 이상과 현실의 타협이며 시대정신과 역사발전 과정의 궤적을 벗어 날 수 없다. 새로운 문화부장관 내정자는 그 궤적의 현재형이란 관점에서 과거 사례 한가지를 말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우갈등과 전쟁의 상흔이 수습되고 1972년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드디어 북한을 추월할 무렵, 그때는 “잘 살아 보세”의 시대였다. 경제개발 정책이 착실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의식의 저변에는 자조적 엽전의식으로 얼룩진 국민적 자신감의 결여, 일종의 패배주의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당시 입만 열면 외쳐대던 ‘유구한 오천년의 문화민족’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았다. 조국근대화의 필요충분조건인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우고 신생 대한민국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획기적 문화정책이 절실했다. 당시 윤주영 제3대 문화공보부장관이 이 문제를 제기, 공론화하고 나아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문화예술정책의 골격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문화예술위원회로 변신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고 전통문화유산 보존계승에서 문화예술 창작과 보급에 이르는 민족문예부흥의 청사진을 구체적이며 단계적 실천과제로 집대성한 문예진흥법과 제1차 문예중흥5개년계획(1974~1978년)이다. 프랑스의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가 제4차 국가경제사회발전계획(1961~1965년)과 제5차계획(1966~1970년) 등에 문예진흥계획을 포함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때 말로가 뜻했던 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처 투성이인 프랑스의 국민적 자신감을 치유하는 문화정체성과 사회적 연대감의 확립이었다.
그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한 이어령 장관은 정부와 국회를 망라한 국가 지도층과 일반 국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 주고 문화예술정책의 새 시대 비전을 제시해줬다. 국민의 정부는 문화산업, 참여정부는 문화평등주의 등을 중요시했다. 국민의 정부는 5명의 문화부장관, 참여정부는 4명의 문화부장관을 배출했다. 장관의 경륜 보다 정권의 코드나 논공행상이 우세한 터에 단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윤주영 장관이 3년3개월, 앙드레 말로가 10년 동안 장관직을 수행했다. 새 문화부장관 내정자의 높은 경륜을 기대한다.
이진배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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