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천주교역사를 말하면서 남인파 서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세례명 요한)을 빼놓을 수 없다. “슬프다 이 나라 사람들이여, 주머니 속에 갇힌 듯 궁벽하구나. 성현(聖賢)은 만리 밖 먼 데 있으니 그 누가 이 몽매함 헤쳐 줄건가. 고개 들어 사방을 둘러 보아도 또렷한 정신 가진 자 보기 드므네.”(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1-1) 다산 선생은 당시 유학의 폐쇄적이며 현실 안주의 모방적인 학문풍토와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산 선생은 사변에 흐른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먼 옛날 공맹(孔孟)의 근본유학의 정신을 되살리려 경전연구에 힘쓰면서도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했다. 이에 따라 서구사회에서 들어온 성경을 독파하는 한편 마태오 릿치 신부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판토하 신부의 ‘칠극(七克)’ 등의 서학서를 탐독하고 당대의 서학 대가인 광암 이벽 선생을 만나 신앙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친형 정약종 선생(세례명 아오스딩), 조선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매부 이승훈 선생(세례명 베드로) 등과 함께 서학강학회와 종교집회에 참여, 1784년 만리 밖 성현을 갈망하며 예수에 앞서 길을 닦은 선구자가 되고자 세례를 받았다.
다산 선생은 당대의 유학자들이 입으로는 “공자 왈 맹자 왈”하면서도 단지 ‘학문을 위한 학문,’ ‘논쟁을 위한 논쟁’의 탁상공론에 빠져 공맹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음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가난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유익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을 주창한다.
다산 선생은 화성을 설계하면서 거중기를 개발해 화성의 외벽을 자연스럽게 돌로 쌓아 올리고 내벽을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해 흙을 돋고 메워 온갖 야생화와 풀들이 자라게 하는 외축내탁형(外築內托形)으로 축성, 하느님과 대자연과 인간과의 조화와 화합, 그리고 상생을 추구했다. 위압감이나 공포감 대신 편안함과 신뢰감을 주는 화성 축성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우주만물을 조성하고 다스리는 대군대부(大君大夫)이신 천주의 뜻을 받드는 효성(孝誠)과 대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 백성에 대한 섬김이라는 천주신앙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다산 선생은 수원 화성을 축조하며 곳곳에 천주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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