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오경석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사진=조남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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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19세기… 개화사상의 선각자

19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는 문호개방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로 무장한 서구 열강들이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 확보를 위해 새로운 식민지 쟁탈에 나섰고, 마침내 미개척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몰려든 것이다. 우리나라를 네차례 방문하여 답사하고 ‘한국과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비숍은,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은 신비스런 존재였으며, 따라서 영국의 지식인들조차 한국이 적도에 있다거나 지중해 또는 흑해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이렇듯 ‘은둔의 나라’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의 대포 앞에 위기를 맞았고, 문을 여느냐 굳게 잠그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대응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는 달리 서구와의 통상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임을 깨닫고 개화를 주장한 세력도 있었으니, 오경석·유대치·박규수가 대표적이었다. 흔히 이들을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鼻祖)라 부른다. 굳이 따지기를 즐겨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세 인물 중에 오경석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853~1859년 사이에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각자’라는 평가를 접하게 된다.

그의 가계와 삶

오경석(吳慶錫)은 1831년 1월21일 서울 청계천(장교동)에서 역관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낸 오응현의 5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원거이고, 호는 역매·진재 등이다. 그의 가문을 보면 고려조에서 조선 중종대까지, 즉 중시조로부터 11세까지는 문과 합격자를 낸 양반집안이었으나, 13세~14세 때 무반이 되거나 15세 때는 역과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17세부터 23세(오경석)까지 7대에 걸쳐 대대로 역과에 합격, 역관이 됨으로써 중인 가문이 되었다. 특히 오경석을 비롯한 다섯 형제가 모두 역관이었고, 24세에서도 오세창을 비롯하여 4명이 역관이었으니, 과거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오경석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 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오경석은 어려서부터 역관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오응현이 집안에 가숙을 설치하고 자신의 과거시험 동기인 이상적을 초빙하여 아들의 교육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경석은 16세 되던 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역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2년 뒤에는 금산이씨(이정의 딸)와 혼인했으나 5년 만에 유행병으로 요절하였고, 김해김씨(김승원의 딸)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며, 글씨에도 탁월했던 오세창이다.

역관으로 활동하던 오경석의 삶에 분수령이 된 것은 23세 때로 처음 북경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후 그는 13차례나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무너져가는 과정을 목격하고, 그것이 조선에도 다가올 민족의 위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중국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는 한편 ‘해국도지’·‘영환지략’·‘박물신편’ 등 새로운 책들을 구입하여 연구하면서 스스로 개화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절친한 친구 유대치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에게도 영향을 주어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오경석은 현실에 직면한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보급함으로써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서울 북촌의 양반자제를 뽑아 개화사상을 가르칠 것을 제안하였고, 1870년 초부터는 박규수의 집에서 박영교·김윤식·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개화사상을 교육하게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74년에는 마침내 정치세력으로서 개화당이 조직되었다.

한편 오경석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함대에 대한 정보를 중국으로부터 입수하여 장기전을 제안하여 이들을 격퇴하는 데 공헌하였으나, 1871년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건의하였다가 대원군으로부터 ‘개항가(開港家)’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나라를 구하는 방책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으며, 이어 1876년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때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풍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금석학·서화에도 뛰어나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돈을 벌어오라는 부인의 구박에 허생이 사업자금을 빌리러 간 곳이 장안의 갑부 변씨 집이었고, 아무런 담보도 없는데다 차림마저 허름한 그에게 조건 없이 1만 냥의 거금을 빌려준 변씨가 바로 역관 출신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역관은 단순히 통역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외국과 마찰을 방지하고 해결하는 외교관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국제무역을 병행한 상인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사행에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에 정부로부터 일정 정도의 사무역을 묵인 받았으며, 주로 인삼을 중국에 가져다 팔고 중국의 사치품을 국내에 들여와 파는 식으로 상당한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러한 역관의 활동이나 부를 축적하는 과정은 <상도> 라는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요즘 한 베스트셀러에서도 역관을 조선 ‘최대’ 갑부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조선후기 갑부 중 상당수는 역관 출신이었다.

오응현 또한 성공한 역관으로 아들 오경석에게 2천석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재산과 집 두 채를 물려줄 만큼 굉장한 재산가였다. 오경석은 이토록 많은 재산을 어디에 사용하였을까.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서화 감식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어려서부터 서화를 좋아한 탓에 중국에 드나들면서 서화·금석유물과 탁본·서적 등 수백 종을 비롯하여 서구의 새로운 서적과 문물을 구입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또한 가정형편이 부유하여 평소 국내외의 많은 미술품을 접해 왔던 그는 김정희를 만나면서 금석학을 전수 받았고,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금석문 146종을 수집하고 해설을 붙여 ‘삼한금석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오경석의 서화 감식에 대한 안목은 아들 오세창으로 이어졌다. 그는 많은 양의 골동서화를 수집한 뒤 이를 서가·화가·서화가로 분류하여 1928년에 ‘근역서화징’을 출판하였다. 솔거 이후 출판 직전에 세상을 떠난 인사에 이르기까지 1천117명에 달하는 서화가들의 작품과 생애·출전 등을 표시한 이 책을 가리켜 최남선은 ‘어두운 바다의 북극성’과 같은 존재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10만 석의 재산을 가진 전형필이 골동서화를 수집하며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데도 오세창의 역할이 컸다. 그는 전형필에게 민족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문화재 식별에 대한 안목까지 전하였다. 실제로 미술관에 소장된 문화유산 중에는 오세창의 감정과 자문을 거쳐 수집된 문화재가 많다고 한다. 하마터면 국외로 반출될 뻔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오늘날 우리가 감상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전형필의 문화재에 대한 열정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오세창, 나아가 오세창이 서화 감식의 대가가 되는데 토대를 마련해준 그의 아버지 오경석의 공까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

■ ■ 가평 회곡리 화야산 자락에 유택 묘비조차 없어 찾는이 마음 허전

오경석 선생의 묘를 찾다

오세창이 기록한 ‘오경석·오세창 연보’에는 1879년 8월에 어머니(김해김씨)와 아버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 과천에 묘를 썼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해 10월19일에 아버지와 두 어머니(금산이씨·김해김씨)를 양근군 북면 율곡리 선영으로 옮겨 합장했다고 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밤나무골이다.

오경석의 유택을 찾고자 북한강과 나란히 달리는 45번 국도를 따라가다 청평대교를 건너서 37번 도로로 갈아탄다. 청평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굽이굽이 돌다 보면 어느새 솔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86번 도로로 접어들면 회곡리 밤가시골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회곡리 마을회관을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황토가 반가운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현대식 묘 두 기를 만난다. 주인공은 오경석의 손자 오일룡과 증손자 오천혁이다. ‘(증)조부님 묘 옆에 묘를 마련하고 비를 갖추었다’는 비문을 통해 가까운 곳 어딘가에 오경석의 묘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경석의 묘는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길 건너편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세 기의 묘가 있지만 아무런 표지도 없다. 마냥 허탈해하고 있는 답사객 앞에 ‘삼국유사’에서나 나올 법한 문수보살의 현신이 이루어진 걸까. 마침 지나던 마을 어르신께서 그중 가장 위쪽에 있는 게 오경석의 묘라고 일러주신다. 좌향은 화야산을 주산으로 하여 북동향을 취하였으며, 다른 두 기의 무덤과는 달리 호석을 둘렀고 상석과 향로석 등을 갖추었다. 역관의 신분으로서 이례적으로 숭록대부에 오를 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요 사상가이며,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게 없을 정도인데다 자손 또한 현달한 그의 무덤에 조그만 묘비조차 없음은 어인 까닭일까. 결국 의문을 품은 채로 비난의 화살을 하나 뽑아든다. 설령 곡절이 있다 해도 유명인사의 묘역을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간단한 안내판이라도 설치하는 일! 그건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고. 우리나라 제1호 ‘개화사상가’의 초라한 모습과 그에 대한 아쉬움으로 화야산에 걸친 노을마저도 마냥 슬프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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