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진지하게 들여다본다면 무릇 인간의 역사란 소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싶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임금과 신하, 백성간에 어찌 소통하여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개된 사건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작은 내 한 가정 안의 모든 이야깃거리가 소통의 문제로 정리된다. 온갖 국제적인 전쟁과 담판, 거래, 법규와 조직이 소통의 문제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태생적으로 생존경쟁의 틀을 벗어날 길도 없고, 그렇다고 서로 마주 기대고 살지 않을 방법 또한 갖고 있지 못한 모순된 인간들의 삶에 있어, 소통의 문제는 숙명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많은 선철들은 사랑이라든가 자비라든가 덕을 가르쳐 소통의 길을 열려고 한 것일테고, 우리의 조상들께서도 홍익과 공경의 아름다운 소통의 원리를 후세에 전하려 애쓰지 않으셨던가. 윤리와 법제뿐만 아니라 통신, 교통의 과학기술까지 인간의 소통에 그 초점을 맞추어 끝도 없는 발전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 문명이 오늘날처럼 발달하기 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끼리 소통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 소통의 문제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음’의 문제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같이 지구가 촌락이 되고 하루종일 통신기계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시대에 웬 소통의 절규가 이렇게 절실한가. 아마도 소통은 거리의 문제는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나의 삶과 상관없는 남에게 무슨 소통의 필요를 느낄 것인가. 가까이 있을수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아픔, 바로 생존경쟁의 치열한 통증이 소통의 갈증을 낳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생존경쟁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너나 나나 모두 어쩔 수 없는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게 서로의 딱한 사정을 인정하다 보면 연민이 생겨날테고, 연민은 상대에 대한 배려를 낳고, 배려는 따뜻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대통령도 해 본 지 며칠이나 됐나 라고 생각해 주고, 시위대도 오죽하면 길바닥에 나섰겠나 라고 서로의 사정을 배려한다면 소통은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아니지 않을까. 좁은 주차장에 삐딱하게 두 칸을 잡아먹고 세워진 ‘벤츠’를 바라보며 부질없는 생각을 공중에 부친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