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촌놈들의 행진

“실력도 있고 우수한데 이 곳에 오면 실적도 없이 벽지지역 점수에만 연연하다 나태한 교사가 되고 만단 말이야….”

갓 전입 온 새내기 교사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아직 생생한데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초임 교사시절 새로 전입한 학교 교장 선생님과의 첫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학교 사정도 파악하기 전에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체육부 활성화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나는 “다가오는 시 종합체육대회에서는 기필코 우승하겠다”고 다짐하며 축구부를 조직했다. 조용한 실천으로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선수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축구선수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한 시간 일찍 학교에 나와 훈련을 했다. 오후 시간 때에는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 속을 끊일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운동장을 뛰노라면 즐거웠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황금의 시간으로 불리는 어느 일요일 정신없이 훈련을 하고 있는데 우식이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다. “축구하지 말라는데 왜 왔느냐?”고 우식이에게 야단을 치며 집으로 데려가려는 것을 겨우 설득한 나는 우식이를 든든한 수비수로 만들었다.

1학기 종업식 날, 통지표를 나눠주고 아이들 모두 떠난 교실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균형이 어머니가 찾아와 “중요한 과목은 ‘양’, ‘가’이고, 필요 없는 체육은 ‘수’”라고 목청을 높이는 어머니한테 나는 평소에 생각하던 체육 인식론을 설명하며 체육의 중요성을 확인시키기도 했다.

어렵게 대회를 준비해 온 우리 학교 축구부는 드디어 그해 열린 시 종합체육대회 축구부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준우승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우리들에게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축구부에서 빼 달라는 부모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학교 축구부는 시 종합대회 준우승 이후 한 달 정도 있다가 한국반공연맹 시지부가 주최하는 자유수호기 쟁탈 축구대회에 출전했다. 마침 이날 학교 강당에서는 과학 및 아이디어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나도 한 작품을 출품했는데 내가 작품 설명을 하는 시간에 우리 팀은 감독 없이 결승전을 치러야만 했다.

작품설명을 마치고 막 뛰어 경기장에 와보니 기특하게도 감독교사 없이 연장전까지 끌어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렸다. 잠시 후 세열이가 화답하듯 상대방 골망을 흔들어 놨다. 운동장 주위를 맴돌며 떠들던 상대편 응원단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우리 팀은 정상에 올랐다.

나는 경기를 마치고 뛰어나오는 선수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아이들도 함께 울었다. 우리들은 운동장 귀퉁이에 주저앉은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해도 서산으로 기울며 우리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우리 선수들은 우승기와 우승컵, 상금, 개인상품과 메달을 목에 걸고 시가지를 힘차게 행진했다. 월드컵 선수들처럼 카퍼레이드는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내 가슴 속에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승리의 축하연이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동네 축구를 해오던 아이들에게 우승의 기쁨을 안겨 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날 나는 가사도 제목도 알지 못하는 노래를 접속곡(?)으로 불러댔다.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한 사랑의 실천이 우승으로 꽃피었던 그 날의 감동은 40여년 동안 나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돼 주었다. 정신없이 교육청과 학교를 오가며 쌓은 열정의 시간들과 함께 정년을 맞게 됐다. 교직생활 40년 6개월 동안 나에게 기쁨을 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내가 학교를 떠난 뒤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나 또한 그 감동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것이다.  /권상도 고양 성저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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