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춘추전국시대

김동훈 경기도건축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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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온통 공공 디자인이란 말의 홍수 속에 너도 나도 공공디자인을 외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인지 유관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다.

언제부터 우리가 공공디자인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지 또 큰 열정을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공공디자인 전문가들을 채용하여 단숨에 무엇인가를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공공디자인이 뭔가요?’ 알만하다 싶은 분에게 질문을 던지곤 곧 후회하고 만다. 공공디자인은 누구 한사람의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공공디자인 정책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탁상공론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또 그들이 무엇을 바꾼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과연 공공디자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공공디자인은 전문가 눈높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공간을 영위하는 분들의 눈높이와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함께 공간을 보고, 즐기고, 느끼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의 디자인이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곳을 이용하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그 분들을 위해서 이같은 공공디자인의 진정한 의미는 항상 반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공공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공공디자인 담당부서를 만들고 전문가를 채용하고 이런 저런 일들을 분주히 해서 될 일은 아닐 듯싶다.

긴 안목을 통해서 진정 ‘그곳’과 어울리는지, 자칫 맞지 않는 옷을 입혀 오히려 그곳의 진정한 미를 해치지는 않는지에 대한 느림의 여유가 접목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공공디자인에 대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공간의 맛을 알고, 멋을 알 수 있는 수준을 올려놓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버스 정류장이나 고치고 간판이나 고치는 것이 공공디자인의 전부는 아니다.

또 안내표지를 새롭게 설치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공공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지금 많은 공공디자인 전문가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공공디자인 전문가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나라 대학에서 공공디자인 전공과목을 개설한지는 채 5년도 안됐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공공디자인이라는 분야의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아 주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공공디자인이란 이름으로 전공 할 기회가 별로 없었을 텐데 모두가 전문가라고 한다. 마치 농사를 지음에 있어 저명한 농학박사 보다 수십 년 한곳에서 농사를 지은 농부가 그 땅의 성질이나 환경을 잘 파악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과 같다.

공공디자인을 말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는데 과연 그들을 공공디자인 전문가라고 인정해 주는 단체는 어디이고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기준이 없으면서 무분별하게 직위 또는 타이틀을 달아준 뒤 적절하지 못한 주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디자인을 한다면 그것을 과연 누구나 인정하는 공공디자인으로 봐줘야 할까라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공공디자인은 집을 지을 때 건축사와 시공자 그리고 건축주가 서로 뜻과 여건이 맞아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한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전문가들이 협동해서 이루어 내야 한다. 또한 그곳을 이용할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가장 중요하다. 단순히 한 두 분의 공공디자이너를 모셔놓고 세상이 아름답게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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