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있는 것 중의 좋은 점 하나는 제자들이 이런저런 일로 다시 선생을 찾아 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이상적이라 생각 했던 군자의 세 가지 삶의 기쁨 중에서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벗이란 배움의 뜻과 꿈을 같이 하는 이들을 말한다. 운 좋게도 선생은 나이나 젠더에 관계없이 늘 배움의 뜻을 같이하는 새로운 벗들과 함께 꿈을 먹으며 살아간다.
제자들은 결혼을 앞두고 주례를 부탁하러 오기도 하고, 취직했다고 활짝 웃으며 오기도 하고, 선생한테 배운 것이 부족하다 싶어 공부를 더 하러 유학 가겠다고 추천서를 부탁 하는 등 대체로 좋은 일들로 선생을 다시 찾아와 준다. 그러나 선생으로서 더욱 큰 보람을 느끼는 경우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이 힘들어, 분풀이 하듯이 내 앞에서 하소연 할 때이다. 취직이 안돼서 부모님을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고,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마저도 꼬여가고 그나마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는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상사가 버티고 있다는 등 자신의 아픔과 답답함을 이해 받기위해 열심히 내게 하소연을 한다. 내 앞에서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면 대체로 그들은 스스로 생각을 정리 한다. 부모 탓 사회 탓 글로벌 경제위기 탓을 하면서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와 동조를 구하는 것이 결국에는 스스로의 부족함과 그 부족함을 메울 수 있는 자신감이 없어서라는 것을 아는 순간 문제는 저절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자신감의 결여는 자신의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한다.
개인의 문제를 떠나 사회적으로는 자신감이 부족한 즉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그가 속한 조직을 쉽게 갈등 속으로 몰고 간다. 개인적인 존재 증명의 조급함이 조직 전체의 비전과 이익을 볼 수 없게 가려버린다. 김정일이 인민을 굶겨 가면서도 미사일을 쏘아 올려 허세를 보인 것도 김일성의 희망이었던 모든 인민을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자신이 없어서이고, 전직 대통령이 권력 말기에 접어들어 일단 돈은 쌓아 놓아야겠다고 조급해 한 나머지 급기야 안사람을 팔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실은 자신감이 없었음의 반증이며 무엇인가 모를 심각한 콤플렉스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창고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텅 비고 가난한 탓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이 그 직책이 무엇이든, 결정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일을 처리함에 있어 욕심이 지나쳐 쉽게 무리수를 두곤 한다. 그리고는 그 과정과 결과를 남의 책임으로 전가해 버리고 싶어 한다. 우리 사회가 처한 모든 갈등의 근원은 정치 영역을 비롯하여 회사, 학교 등 각종 단체와 조직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고 앉아 끊임없이 무리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벚꽃 잎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봄날에, 한번쯤 밤을 꼬박 새워 고민하면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당장 필요한 건 마음의 가난을 깨닫고 자신을 채워 나가는 것이라는 걸 인식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형태의 인식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단순히 세상의 이치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 있어, 젊고 새로운 벗들과 배움의 뜻을 같이하고 함께 꿈을 먹으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 덕분에 자주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어, 머리가 굳어져 버리지 않음에 항상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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