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무형문화재를 찾아서 (2)소목장 김순기씨
공방은 소나무향으로 가득했다. 벽면에 세워져 있는 여러가지 문양의 창호들, 문을 열면 과거의 풍경이 되살아날 것만 같다. 호롱불 아래 책장을 넘기는 선비에서부터, 온화한 부처의 미소 아래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스님…. 창호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 하다.
지난 6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4호 소목장(小木匠) 김순기씨(68)를 만난 곳은 과거가 머물러 있는 곳,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의 ‘김순기 창호전시관’이었다.
전시관 옆 작업장에서 들려오는 망치 소리는 애틋한 과거의 소환을 알리는 듯 정겹기까지 했다.
◇빛과 바람의 통로, ‘창호(窓戶)’
우리 선조들은 창을 건물의 눈으로, 창살 무늬를 집의 표정으로 여겼다. 특히 문으로 사용된 창호는 낮에는 솔솔한 바람이, 밤에는 달빛이 넘나드는 통로이자 인간과 자연, 건물이 하나가 되는 길목이었다.
“전통창호의 멋스러움은 이른 아침 해뜰 무렵 창호를 통해 은은히 비춰오는 빛의 감촉을 느낄 때”라는 소목장 김순기씨는 나무와 함께 50여년을 살아온 장인이다.
대목이 건축의 구조 부분을 담당한다면 소목은 수장과 장식 부분을 담당한다. 소목 분야는 공포를 만드는 장인, 나간과 닫집, 장엄장식 등을 만드는 분야들로 다양하게 분화돼 있다. 하지만 지금 다른 소목 분야는 그 기능이 거의 단절되거나 사라지고 가구장과 창호장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씨는 소목 일 중에서도 전통 창호 제작에 일가를 이루고 있다. 창호란 말 그대로 통풍과 채광이 목적인 창(窓)과 방들을 연결하는 호(戶)를 일컫는다.
경복궁, 수원 화성행궁, 여주 명성황후 생가, 남한산성 상궐, 운현궁 등 수 많은 고궁들의 창호가 그의 손에 의해 복원됐다. 또한 수원 용주사, 강원도 월정사, 여주 신륵사, 파주 월상사 등 전국의 사찰들을 비롯해 최규화, 조병옥 등 유명 정치인의 저택에도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전통창호는 단순히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통로만은 아니다. 자연미과 인공미가 결합한 비례의 예술성을 지녔다. 그 비례는 문양에 따라 완자창·세살문·빗살문·꽃살문 등으로 나뉜다.
완자창은 ‘아자(亞子) 완자창’과 ‘칠살완자창’이 있으며, 고궁의 창살은 모두 이 문양들로 만들어졌다. 세살문과 빗살문은 각각 그 모양이 앞과 뒤가 같은 ‘배미리형’인가, 아니면 앞은 원형이고 뒤가 네모형인 ‘투미리형’인가에 따라 구분된다.
배미리형은 일반 백성의 집에서 사용됐는데 문짝 하나 만드는데 사흘 정도 걸리고,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쓰던 투미리형은 닷새 정도 소요된다.
고급 문짝일수록 창살수가 많은데 홈 하나에 0.1mm의 오차만 생겨도 창살과 문짝이 맞지 않아 바람이 샌다. 이 기술을 익히는데만 5~10년이 걸린다.
최고급 문짝은 몇 개의 조각을 써서 하나의 꽃을 만드는 꽃살문. 연꽃형, 원형, 육각형, 나뭇잎형 등이 있으며, 기하학적인 연속무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멋스러움을 지녔다.
◇창호 광(狂), 김순기
“난 7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장기나 바둑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 밥을 먹을 때도 문짝만 생각나.”
김씨는 여타의 무형문화재들과는 달리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축에 속한다. 요즘 들어서도 울산 현대중공업 소유의 100칸짜리 영빈관의 문짝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내년에는 광화문 복원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처럼 많은 일들이 그에게 몰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머릿속에 오로지 문짝밖에 둔 것이 없다”는 고백처럼 김씨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성실함이 남다르다.
“한번은 어머니 제삿날인데 일이 끝나지 않는 거야. 순간 ‘어머니는 날 이해하실 거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머니 제삿날에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을 할 만큼 김씨는 “일을 맡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일이 밀려 있을 때면 밥 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흰죽을 둘러 마시며 계속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의 목재 시장에서 ‘수원의 큰손’으로 소문이 나 있다.
“좋은 창호는 첫째는 재료요, 둘째가 기술이야. 좋은 나무가 있으면 무조건 다 사들였지.”
예로부터 최고의 건축자재는 백두산 소나무, 경북 울진, 봉화 등지에서 생산하는 춘양목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춘양목은 멸종 직전이라 간신히 보호받고 있고, 극소수의 생산품은 궁궐보수에 사용되고 있다. 대체목이 필요했던 김씨는 춘양목이나 육송을 대체할 나무를 찾기 위해 수입 소나무를 종류별로 실험을 계속했다. 결국 8년이 걸려서야 캐나다산 홍송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덟 손가락 중 성한 손가락은 단 하나
안성 노곡리에서 태어나 14세부터 창호 만들기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55년째. 그러나 처음부터 문 만드는 인생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쌀 두 가마에 남의 집 머슴으로 팔려갔던 그를 외할머니가 버선바람으로 찾아와 “굶어죽어도 머슴살이는 안된다”며 보낸 곳이 당시 수원의 인간문화재 이규선씨의 목공소였다.
전통 창호 만들기 55년
경복궁·화성행궁 용주사 등…
전국에 복원 손길 닿아 있어
오른손가락 둘 사고로 잃고
일곱 손가락도 봉합수술
휘고 뒤틀린 손이지만
門에는 한치의 어긋남 없어
후학양성 책임 느끼지만
배우려는 사람 없어 걱정
그를 ‘최고의 창호 문 제작자’로 만들어준 손가락은 여덟 개다. 오른쪽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기계에 잃고 그나마 남은 손가락도 왼쪽 중지를 제외하고 한 번씩은 봉합수술을 거친 상태다.
“그때가 스물아홉이었을 거야.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지. 손가락 세 개만으로는 연장을 쥘 수가 없었거든. 그냥 딱 죽고 싶었어. 몇 달을 안성으로 용인으로, 양평으로 헤매고 다녔지.”
그때를 생각해서인지 김씨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하루는 다짜고짜 담양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 손목만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을 보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지. 그래서 그날로 다시 시작했어. 행복과 불행의 차이 뭐 있어.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다시 시작한 문 만들기. 그러나 한 번 사고가 나기 시작하자 불운은 이어졌다. 나머지 여덟 손가락 중 한 개를 제외하고 차례로 봉합수술을 받았다.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손이지만 그 손에서 만들어진 문에는 한치의 뒤틀림도 어긋남도 없다. 그저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달리 적합한 표현이 없을 정도다.
◇사람이 없다
전수조교 안규조씨는 15년째 김씨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얼마전에 규조가 독립할 뜻을 내심 비추더라고. 내 나이 벌써 70인데 이제사 어떻게 후계자를 키워야 할지.”
후계자 생각만 하면 걱정이 앞선다는 그는 후학을 양성해야 할 책임을 느끼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예 일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받을 수는 없는 일. 생각보다 쉬운 일도, 보수가 많은 일도, 남들이 인정해 주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행여나 찾아오는 사람도 “열 번, 백 번 다시 생각하고 오라”며 돌려보내기 일쑤다.
바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 석자를 딴 ‘무형문화재 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양성관네 집은 누가 살아도 양성관네 집’인 것처럼 “누가 봐도 김순기가 지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멋들어진 집 한 채 짓고 싶은 게 소망”이라며 환하게 웃는 그에게서 진정한 ‘꾼’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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