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가정 아이들의 방학생활

신나는 방학이다. 아이들은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을 뿐 등교하듯 학원에 다니며 바쁘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학교나 학원에서 실시하는 스키캠프에 참여하거나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은 예삿일이다. 올해 들어 신종플루 때문에 주춤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방학을 이용해 어학연수나 해외를 나가는 경우는 이미 흔한 일이다. 아이들은 방학을 통해 자신의 특기를 개발하거나 부족했던 학습을 메우는 시간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빈곤가정 아이들의 방학 생활은 어떨까? 일반 가정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고 자기 개발에 힘쓸까? 그럴 여유도 겨를도 없다. 대부분의 빈곤가정 아이들은 환경에 짓눌려 생활하거나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다.

 

유리네의 일상을 예로 들어보자. 초등학교 4학년인 유리는 1학년인 호동과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랑 생활하고 있는 조손가정의 소녀가장이다. 할머니는 75세로 관절염과 중풍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식사를 하는 것조차 노동이다. 유리는 아침 7시쯤 일어나 밥을 해서 할머니랑 동생을 챙겨주고 집 청소를 끝내면 10시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유일하게 다니는 영어학원에 갔다가 12시가 넘어 돌아와 점심을 준비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쯤 할머니를 모시고 보건소에 간다. 관절염으로 일주일에 세 번은 보건소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어야 관절염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걸음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축한다는 것이 유리에겐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다. 5시경 돌아와 방학숙제를 한다. 개구쟁이인 동생은 그새 어디에 갔는지 집에 없다. 친구들은 다 학원에 다녀 놀 친구도 없을 텐데 어둡고 좁은 지하방에 있는 것이 답답했던지 추운 날인데도 매일 놀이터에서 놀다가 해가 질 무렵 들어온다. 먼지투성이가 된 동생을 씻기고 6시경부터 동생이랑 동네 시장에서 반찬을 사와 바로 저녁을 준비한다. 오래돼 말썽을 부리는 가스레인지와 몇 번 씨름을 하다 겨우 불을 붙이고 능숙한 솜씨로 저녁밥과 국을 끓인다. 반찬이라고는 김치와 나물 그리고 멸치가 전부다. 매번 먹는 반찬이라 좋고 나쁨도 없이 배가 고프니 먹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동생 숙제를 봐준다. 9시 반경 잠자리를 준비하고 10시쯤 잔다. 이것이 유리의 하루 일상이다. 이러한 일상은 방학이 끝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부들의 가사노동은 얼마나 될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30대 중반 여성을 기준으로 하루 14시간 정도로 보고 있다. 음식준비와 정리 3시간 30분, 세탁과 다림질 1시간, 청소와 정리 40분, 시장 보기 등 가정 관리 1시간, 은행과 관공서 일보기 등 가정 경영 30분, 미취학 자녀 돌보기 5시간, 초등학생 자녀 보살피기 2시간, 배우자 보살피기 20분이다. 빈곤가정 아이들의 가사노동은 주부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8년 동안 1천500번이 넘는 어려운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해 본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참 버거운 노동이다.

 

유리는 자신의 이런 삶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보다 친구들이 알게 되는 것이 더 싫다. “넌 왜 엄마가 없니”라고 친구들이 물으면 말도 않고 집으로 달려간다. 어려서부터 듣기 싫을 만큼 들어온 소리지만 유리는 엄마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글썽인다. 게다가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때론 힘에 부쳐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을 지켜봐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또래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동안 유리는 저녁 반찬거리를 고민하고 있다. 빈곤가정 아이들은 가사노동에 눌려 희망을 잃고 있다.  /권혁철 어린이재단 후원자 서비스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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