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동안 진행됐던 동계올림픽은 우리에게 감동과 기쁨은 물론 한국인으로서 더 큰 자부심을 갖게 했다. 특히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딴 스피드 스케이트의 이상화와 피겨스케이트의 김연아는 세계최고라는 사실보다 더 크고 소중한 가치에 박수를 보내게 했다.
또한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은 코미디 프로그램 제목일뿐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봅슬레이로 출전한 강광배는 단 한 곳의 썰매 트랙조차 없는 한국의 실정에서 봅슬레이로 결선레이스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5번째 도전에서도 메달획득에는 또 실패했지만 금메달을 딴 영웅들의 공통적 우상인 이규혁 등.
물론 아름다운 2등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1등, 비난받는 2등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봅슬레이팀, 스키점프팀이나 이규혁 선수는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고 영광과 갈채는 일등에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다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은 메달 색깔과는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특별한 감동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과연 이상화나 김연아가 개인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했고 전용 연습장을 갖추고 있는 여건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도 이만큼 큰 감동을 주었을까? 만약 봅슬레이 선수나 스키점프선수들이 연습장이나 다른 여건을 갖추고도 메달은 커녕 등수안에도 제대로 못들었다면 그들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을까?
결국 이들이 우리에게 준 감동과 기쁨은 아마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렇기 때문에’의 차이를 얘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는 인과적 관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원인이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올 때 쓴다면 이와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어떤 사건이나 원인이 기대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결과를 가져올 때 사용되는 접속어적 성격을 띠는 부사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길 바란다. 우리의 일상적 기대,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보편적인 결과가 아닌 ‘튀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그런 일들이 자주 있길 바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은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에’, ‘힘든 여건이기 때문에’, ‘꼴찌이기 때문에’ 등 많은 사실들이 주로는 ‘그렇기 때문에’로 설명되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금 그 사실을 일반화해버린다.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보다는 ‘그렇기 때문에’가 더 설득력이 있는 사회일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고 또한 변화하기 어려운 사회일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우리의 일반적 기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통용되는 사회가 바로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시골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명문대를 입학할 수 있는 사회’, ‘여당 국회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정책에 동의 할 수 있는 사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사회’ 등의 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표현되는) 특별한 사실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과관계, 즉 ‘그렇기 때문에’로 설명될 수 있길 바란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지난 맨해튼 카네기홀에서 전 세계를 감동으로 이끈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의 연주를 더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최순종 경기대 사회과학대학 청소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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