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된 동아시아 정신 되살리자 유교문화권 새 르네상스를 위하여
지난달 25일부터 4일 동안 대만을 다녀왔습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13차 회의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동아시아인문독서대학’의 개설을 집중적으로 토론했습니다. 6년 전부터 인문도서를 주로 출판하는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의 출판인 30여 명이 책을 통해 ‘동아시아의 발견’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동아시아 출판공동체·독서공동체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책으로 소통하고 책으로 동아시아의 문화시대를 새롭게 열 수 있다는 것이 이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출판인·편집자들의 생각입니다.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동아시아가 근·현대에 오면서 서구에 침식당하고, 서구의 이론과 사상에 경도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반듯한 인간과 사회를 세우는 정신과 사상의 근거로써 우리는 동아시아의 정신과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그 책을 읽는 문화운동으로써 우리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발족시켜 나름대로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국가들과 그 민족들은 본래 같은 책을 읽었습니다. 근·현대에 오면서 그것이 단절되고 상처받았습니다. 전쟁과 침략과 갈등으로 지적·문화적 교류와 소통이 파괴됐습니다.
여러 차원에서 동아시아는 이제 밀접한 연관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갈등하면서도 ‘동아시아공동체’라는 말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그러합니다. 이 변모되고 있는 동아시아 전체 차원의 살림살이 속에서, 일련의 의식 있는 인문학 출판인들이 손잡고, 우리 출판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차원의 책의 문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3년의 작업 끝에 지난 4월 ‘동아시아인문도서 100권’을 선정·발표했습니다. 20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에서 출간된 명저와 문제작들은 현대 동아시아의 지적·사상적 성과입니다. 동아시아 차원의 주체적 문제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한국·중국·일본에서 각각 26권씩, 나머지가 대만·홍콩의 책들인데, 우리는 각국어로 이들 책들의 해제집을 펴냈습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이 책들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해서 출판하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서구 일변도로 번역·출판되는 문화적 불균형 상황 속에서, 이들 책을 번역하는 일은 동아시아적 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사 또는 동아시아 출판문화사에 일찍이 없었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동아시아에는 어디 이들 책만이 존재하겠습니까. 다양한 문제의식의 책들이 수다하게 기획되고 저술되고 출간됩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의 회원들은 ‘동아시아인문도서 100권’뿐 아니라 지금 힘차게 전개되는 동아시아 출판문화를 또한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들 책을 소개하고 출판하는 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시민들이 함께 동아시아 책을 구체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동아시아인문독서대학’을 개설하려는 것입니다.
폭력과 전쟁, 물질과 갈등이 난무하는 이 21세기에, 일련의 출판인들이 대학·기업·미디어와 손잡고 강좌를 개설해서 동아시아의 정신과 사상, 가치와 이론을 학습하는 ‘출판운동·문화운동’은 참으로 의미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동아시아의 시민들·지도자들·CEO들·교육자들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운용돼야 하는가를 논구하고 성찰하는, 동아시아학을 함께 학습하는 지적 실천과 인식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의미할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책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출판인들의 문제의식입니다. 동아시아인문독서대학도 같은 문제의식입니다. 동아시아의 책을 읽는 시민들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시대를 창출해 낼 수 있습니다.
김 언 호
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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