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 경배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피를 따뜻하게 데워서 몸 구석구석으로 펌프질을 하는 심장처럼 건물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는 저 보일러 화염 투시구 속 불길이 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웅웅 돌아가는 보일러 곁에서 불꽃을 조절하는 보일러공인 시인은 한 여자에게 들어 바치는 우련 붉은 청춘의 꽃처럼 뜨거운 마음을 일찍이 저 불꽃에게 바쳤다. 그러니, 한 생을 보일러 불꽃 덕에 먹고 산 시인이 언젠가 때가 되면 저 불길에게 한 몸 들어 바쳐도 되겠다. 빚 갚듯이 한 몸 던져 태워도 억울할 것 하나 없겠다.  <이덕규 시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