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고 싶은 곳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대상이 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삶에서 중요한 의미와 방향을 갖게 된다.

 

하루에 100명의 딴 얼굴을 바꿔가면서 바라보게 되면 절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거의 한 곳, 한 대상만 주시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강변에 성벽처럼 둘러서있는 아파트.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많은 시간 무엇을 바라보며 지낼까? 아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게 될 게 아닌가. 어떤 마음이 들까?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허름한 집을 짓고 암치료를 하고 있는 지인이 있다. 가끔 편지를 보내주는데, ‘오늘은 홍단풍 사이를 걸었어. 빨간 단풍이 이렇게 매혹적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등 편지를 보낼 때마다 바라보는 대상이 바뀌어져 있고 그 바라보는 대상에 대하여 매료되어 있었다. 역시 자연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평안하고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바라보는 대상 따라 삶도 달라

 

또 미국 도심 속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아는 분은 이런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온통 노랑내가 나서 아무 것도 바라볼 게 없었어요. 옥수수 익는 냄새, 마늘 냄새 가득한 밭둑길을 내려다보고 싶었지요.’ 몸은 미국에 있었지만 감각은 한국에 남아있었다. 바라봄의 대상은 고국에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섞는’ 역사이긴 하다. 어떻게 섞이느냐 무엇과 섞이느냐가 중요하다.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각도 이 섞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같이 우리 삶의 정체성은 벽을 뚫으면서 섞이려고 하는 통에 바라보는 것들도 흐려지고 있다. 아무리 바라보는 대상을 익명으로 가장시켜도, 우리에게 부글거리며 급격히 다가오고 있는 퓨전의 시각과 관점은 어쩔 수 없다.

 

한편의 시를 소개한다.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 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닿고 싶어 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오랜 시간 바라보다보면 닿고 싶은 대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자연을 바라보면 자연에 순응하는 깊은 바라봄의 대상, 닿고 싶은 곳이 생긴다.

 

퓨전 문화속 넓게 보는 눈 가져야

 

우리는 퓨전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퓨전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까? 하루 종일 TV시청이나 인터넷을 즐기는 젊은이들은 어느 집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거의 모니터 크기 안의 것들만 하루 종일 바라보게 된다. 퓨전 사극, 에로, 공포 만화를 폰 카드로 보고 듣는다.

 

그런데 가끔 3m씩 뛰어오르는 바다도 보았다가 작은 제비꽃잎을 바라보기도 하고 큰 산을 넘는 구름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런 것에 닿고 싶은 마음은 이제 이 시대에선 없는 것일까?

 

최문자 협성대 총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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