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의 항일투쟁 60년

김종구 논설위원 kimjg@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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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종료 10분이 남았다. 김용식의 드리블이 중앙선에서 시작됐다. 현란한 개인기로 스웨덴 선수를 제쳤다. 페널티 에어리어에 도착하자 수비들이 그를 에워쌌다. 순간 김용식의 눈이 반대편 빈 공간을 향했다. 절묘한 패스가 들어갔고 기다리던 마쓰나가가 골을 터뜨렸다. 3대2 역전승. 그런데 승자는 ‘Nippon’이었다. 1936년 베를린에 기록된 또 다른 ‘일장기 설움’이다.

 

김용식은 한국 축구의 대부다. 경술국치(1910년)에 태어난것부터가 운명이다. 아버지 김익두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끌려가 늑골이 부러졌다. 김용식도 그런 축구인생을 살았다. ‘3전(錢) 내기’ ‘매 맞기’로 일본 애들을 괴롭혔다. 경신 시절에는 일본 최강 와세다 대학을 꺾어 경성거리를 광란에 빠뜨렸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결국 퇴학당했다. 모든 게 운명이었다.

 

-KFA 장택상 회장이 선수들을 집으로 불렀다. “지면 현해탄을 넘어 오지 말고 고기밥이 되라”. 1954 스위스 월드컵 예선 일본 원정길이었다. 결과는 5:1, 2:2. 1승 1무로 한국의 승리였다. 광복 9년만에 처음 붙은 일본과의 경기는 그렇게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 때 피멍으로 골문을 막은 수문장이 홍덕영이다.

 

홍덕영은 늘 대한민국 최초였다. 올림픽도 최초였고, 월드컵도 최초였다. 그 역시 항일투사를 아버지로 두고 있다. 부친 홍기진은 3·1 운동으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임시정부와 신간회의 핵심 간부를 지냈다. 일본에 질 수 없는 피를 이미 몸속에 타고 난 것이다. 해방후 그가 지킨 골문은 결코 일본에 무너지지 않았다.

 

-반 세기도 훨씬 지난 2005년 3월 17일. 대한축구협회가 위대한 축구인을 선정했다. 선수 출신으로는 김용식·홍덕영·이회택·차범근 4명이 뽑혔다. 이회택 차범근 역시 현역시절 ‘일본에 지지 않는 선수’로 유명했다. 모든 게 대물림이다. 한국 축구 129년을 이어 온 한국축구속의 항일유전자다.

 

이제 내일이 한·일 축구다.

 

독도만행에 대한 반일감정이 들끓고 있다. 시민들의 분노가 공항을 뒤덮었다. 이런 때 열린다. 탐색전은 생략될 것이고 곧바로 난타전에 돌입할 것이다. 심박수 100을 억누른 국민들이 무섭도록 하나된 성원을 보낼 것이다. 모든 게 60년 전 그대로다. 일본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한·일 축구전쟁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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