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물폭탄과 초강력 태풍이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다. 한반도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경사지나 계곡 주변 등 위험지역의 무분별한 건축과 당국의 인허가가 산사태 참사의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인재(人災)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높아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와 지자체는 뒤늦게 도시홍수 방재시스템 도입, 하수관거 용량 확대, 방재시스템 재설계 등 대안을 내놓고 있다. 사실 기후변화에 따른 대책은 지난해 광화문 물바다 피해 등 이미 수없이 제기됐던 터라 정부의 수다스러움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서둘러 발표하는 정부의 대안이 국민에게는 산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로만 들릴 뿐 진심으로 와 닿지 않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때늦은 대처법에 식상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과 유럽발 금융위기가 겹치면서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태풍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불신도 높아가고 있다.
특히 ‘금융시장 북극성’이라며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된 미국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는 사상 유례 없는 소식에 전 세계 금융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제2의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도처에 확산되며 실제 그 피해는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문제는 이 같은 태풍에 앞서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경기침체로 ‘더블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제기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더블딥 우려가 낮고 금융위기 때와 상황이 다르다며 낙관론으로 일관했고, 금융 부문 당국자들도 세계증시와 외환시장이 급등락하면 국내 금융시장도 출렁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한 만큼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을 펴왔다.
물론 국민의 불안 해소를 위해 정부가 희망 섞인 전망을 한 것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정부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가며 국내경제가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질 뿐이다.
전 세계적인 상황이라고 하지만 ‘블랙먼데이’가 오는 등 유독 한국에서의 피해가 커지면서 실물경제까지 위협하고 있다. 끝 없는 증시 추락에 손절매 타이밍을 놓친 개미들의 절규가 끊이지 않았고, 전자, 건설, 제조업 등 산업계를 중심으로 불안감이 휘감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 정부가 경제 구조상 미국과 유럽에 대한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의 위험을 너무 방관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우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발 악재가 빠르게 실물 부분으로 전이되면서 중소기업들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생존게임에 빠진 채 극심한 자금난을 겪은 경험이 있다. 특히 냉골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설업계는 부동산 가격 폭락과 넘쳐나는 미분양 주택에 금융위기 1년 만에 중견·중소 건설사 218개 업체가 문을 닫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이에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주가 하락과 달러가치 급변동 등 금융시장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국내 기업 수출 감소와 기업 실적 악화, 국내 경기 침체로 끝을 맺는 경제도미노현상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경제에선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취약한 금융구조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대안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국제적인 신뢰도 높이지 못했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개인투자자나 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항구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
흔히들 늦었다고 할 때가 시작할 때라고 말한다. 설사 이번 위기를 잘 넘겼더라도 또다시 위기가 올 수 있다. 단순한 미봉책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다.
이용성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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