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옛날 영화 ‘노틀담의 꼽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시작 인트로(intro) 부분의 장면 하나가 그대로 각인되어 떨어질 줄 모른다. 원작 소설의 모티브가 된 단어 ‘ANAYKH’ 때문이다. 노틀담 성당의 지하 벽면에서 발견된 이 글자는 고대 그리스어로 ‘숙명, 슬픈 운명’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20대 후반의 젊은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 글씨를 새긴 사람의 삶의 고통과 슬픈 사랑의 운명을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세계관 인간관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등장인물을 설정하고, 성격을 부여하고, 서글픈 운명을 제시하며, 커다란 이야기를 엮어냈다. 지금도 이 이야기는 영화로 애니메이션으로 뮤지컬로 제작되어 여전히 흥행을 누리고 있다. 하나의 낱말이 소설의 탄생을 넘어 문화를 낳은 셈이다.
이처럼 생각은 상상을 낳고, 상상은 창조를 낳고, 창조는 예술과 문명을 낳고, 예술과 문명은 문화와 삶을 낳는다. 그리고 삶은 다시 생각을 낳는다.
생각(think)은 사고력에서 나온다. 불쑥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온다.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마음대로 들락날락한다. 뒤죽박죽이다. 이들 중에서 하나를 붙잡고 매달리면 생각은 고뇌와 사색과 성찰로 바뀐다. 상상의 씨앗으로 자란다.
상상(flow, imagine)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생각 중에서 하나를 붙잡고 매달려 키워가면서 몰입의 과정을 거쳐, 시간과 공간을 입히고 형체를 부여하면, 흐리던 영상은 차츰 선명해지면서 정형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창조의 실마리가 된다.
창조(create)는 창의력에서 나온다. 상상 중에서 정형으로 다가온 것에 나의 경험과 남의 경험을 섞어서 그려내 발전시킨다. 발명이 된다. 창작이 된다. 과학과 기술로, 예술과 문명으로 자란다.
예술과 문명(make, perform)은 구성력과 표현력에서 나온다. 문학으로, 미술로, 음악으로, 무용으로, 그리고 영화로 우리 앞에 나타나면 그것은 예술이다. 과학으로 제품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면 쓰임을 담은 기술이요 문명이다. 진(眞), 선(善), 미(美), 용(用)으로 우리를 편리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해 준다. 예술과 문명으로 태어난다.
문화와 삶(use, utilize, live)은 운용력과 이용력에서 나온다. 예술과 문명으로 나타난 것을 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즐기고 이용한다. 특정 계층이나 부유층의 전유물에서 점차 대중화된다. 그러면 생활이 되고 일상이 되고 삶이 되어 흐름을 이룬다. 어느덧 낯설지 않고 당연한 것이 된다.
좋은 계절이다. 생각이 삶을 낳고, 삶이 곧 생각을 낳는다. 보고 듣고 만들고 꾸미고 행동한다. 책을 읽고 사색한다. 씨앗을 많이 갈무리한다. 나의 생각나무를 부지런히 물 주어 키운다.
김태석 용인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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