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우리 국악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일이 평택에서 벌어졌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평택농악의 전통 보존과 전승 활동을 위해 평택호관광단지에 평택농악마을을 지으면서 한국소리터와 지영희홀을 동시에 개관한 것이다.
평택은 소사벌이라고 불리는 드넓은 평야와 서해가 접해있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풍년이나 풍어를 기리는 농악과 민속 음악이 성했으며 조선 후기 5대 남사당의 하나인 진위 남사당을 이끈 유세기를 비롯해 조선 후기 8대 명창 모흥갑, 대금 시나위의 명인 김부억쇠, 경기시나위 동령제 대금 명인 방용현, 방돌근,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이며 해금 시나위의 명인 지영희, 남사당 꼭두각시 명인 송창선, 평택농악의 최은창, 이돌천 명인 등 수 많은 전통예인을 낳은 문화의 고장이다.
특히 우리나라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인 지영희 선생은 그 업적에 비해 지금까지 큰 조명을 받지 못해왔다.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 무속음악 가문에서 태어난 지영희가 국악계의 큰 봉우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지영희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소년기에 몇 차례 가출해 굿판의 악사로 참여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해금, 호적, 피리, 대금, 무용을 배워 민속 음악과 무속음악을 동시에 아우르는 폭넓은 국악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무속음악으로 시작해 피리, 태평소와 같은 관악기, 해금, 아쟁, 거문고, 가야금과 같은 현악기, 경기민요와 무용,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며 국악 전부분에서 최고봉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국악사에 남긴 지영희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당시 전통만을 고집했던 국악을 시대적으로 재해석해 현대음악과 접목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국악의 현대화에 앞장선 선각자였다는 것이다. 지영희는 국악을 오선보에 옮기는 작업을 시도해 오늘날과 같이 국악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도록 발전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것이 지영희 등 국악예술학교 교사들의 주도로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인 것이다. 이 국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가 바로 지영희 선생이다.
전통음악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지키시면서 국악을 현대화한 지영희는 국악교육자로 박범훈, 최경만, 김영재, 최태현, 김덕수, 박상진, 최종실과 같은 이 시대 최고의 명인들도 길러냈다. 지영희 선생이 작고한지 30년이 흘러 선생이 태어나 성장한 곳에 지영희홀이 문을 열었다. 선생은 잠드셨지만 식을 줄 모르는 선생의 예술혼이 지영희홀에서부터 다시 피어날 것이다.
오용원 경기도문화원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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