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등컬, 그것도 아주 오래 묵어 수피(樹皮)가 거칠어진 매화등컬 같았다. 팔순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지인 몇이 조촐하게 저녁이나 먹자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본, 그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시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인지. 그는 약간 희미해져 있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불과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진회색 공단 넥타이에 같은 색의 베레모를 쓰고 자주색 재킷을 걸친 멋진 노신사였는데…. 아들에게 사업을 물리고 난 다음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즐기겠다더니 영 풀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사를 나누며 내가 늙은 매화등컬 같다고 했더니, 그가 일순 눈을 반짝인다.
최근에 들은 인사말 중 그중 맘에 든다는 것이다.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는 매화가 주제가 됐다. 매화에 관한한 그는 어느 식물학자보다 뛰어나다. 매화의 종류며 생육조건, 군락지 개화 시기 등을 훤하게 꿰고 있다. 이맘 때 쯤이면 섬진강변 매화는 만개 시기를 지나 꽃잎을 흩날리고 있을거라고 했다. 구례 화엄사, 장성 백양사, 강릉 오죽헌, 순천 선암사가 손꼽히는 매화 군락지라고 했다. 수령 350년에서 600년된 매화도 있다는 것이다.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매화
그는 또 매화를 치는 솜씨도 뛰어났는데, 어느 해에는 자신의 생일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매화 그림 한폭씩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매화를 그리는데는 대략 다섯가지 요령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늙은 가지가 오랜 풍상을 겪은듯 그려야 하고, 둘째는 줄기가 가는 것과 굵은 것이 뒤틀려 괴이한 모습이 돼야 하며, 셋째는 가지가 말쑥하닌 빼어난 모습으로 그려야 하고, 넷째는 가지 끝 부분이 강건하며 필체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꽃 모양이 기이하고 아리따운 모습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늙은 매화등컬 같다고 한 내 치사가 더없이 반가운 이유는 매화는 늙어 비틀어진 고목이 더 고졸하고 품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십까지 풍류를 즐기며 한량으로 사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사랑채 앞 매화가 꽃망울을 벙글기 시작하면 아예 방문을 열어놓고 계셨다. 그것도 달밤에 즐기는 매화 암향(暗香)의 운치가 그만이라며 한밤중에도 사랑마루에 나와 앉아 계시곤 했다.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겪고 난 꽃이 봄을 연다고 겨우 보름 남짓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을 혼자서 시들게 하면 너무 삭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혼탁한 세상, 매화 향으로 씻고 싶다
“매화는 이름이 여럿이여, 일찍 핀다고 해서 조매(早梅) 겨울에도 핀다고 해서 동매(冬梅), 눈 속에서 핀다고 설중매(雪中梅), 봄기운에 꽃망울을 연다고 해서 춘매(春梅), 봄기운을 알린다고 일지춘(一枝春) 혹은 청객(淸客),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졌다고 해서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고 하지.”
꽃이 질 때 쯤이면 할아버지는 꽃잎을 거두어서 차로 드셨다. 그리고 당신 얼굴에 거뭇거뭇하게 핀 검버섯을 고목에 핀 매화라고 농을 하기도 하셨다.
모임이 끝날 무렵 백운산 자락을 감도는 섬진강 나루터로 지는 매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매화꽃 피는 곳마다 휘파람 새가 따라다닌 다는데, 나도 휘파람새처럼 매화꽃을 따라나서고 싶다.
매화 향으로 선거 광풍이 휩쓸고 간 혼탁한 세상을 씻고 싶다.
신효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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