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어머니

어느 해인가 ‘어머니 날’이라 남양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서 고향집에 들어서니 비어있다. 아차,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지 오래 전인 것을 까맣게 잊었구나.

‘조카 내외는 밭에 나갔군’ 하고 되돌아오는데 모퉁이 개울가 오솔길에는 어린 시절이 아른거리고 어디선가 마주칠 듯 선명한 어버이 모습에 계실 때 못다함이 아쉬워 가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뜨거웠다.

돌문이 고개에 올라 고향집 돌아보니, 어둔 밤에 집에 오며 이 고개에 오르면 방문을 여시고 등불 저으시며 불 밝혀 주시던 어머니. 먼 길 떠나며 이 고개 돌아보면 굽은 허리 힘주시며 손 흔드시던 어머님의 손길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4남3녀의 막내로 태어나 암죽을 먹고 자라 서너 살 넘어서도 엄마 품이 그리워 틈만 있으면 품에 안겨 빈 젖을 물고 이마에 땀방울, 쪽에 꽂은 비녀를 보며 잠이 들었다. 대여섯살 되어서는 엄마가 즐겨 읽으시던 춘향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등을 따라 읽으며 한글을 깨쳐 밤이면 동네 할머니들 안방에 모여 앉아 들으시고 울고 웃으며 즐기셨다.

어머니는 어린 두 팔에 실타래 걸고 솔솔 풀리는 실을 재미있게 감으시다가 실이 엉키면 엉킨 것을 잘라냈다. 새 가닥을 감지 않고 조용히 숨죽이고 이리저리 엉킨 것을 풀어 감으셨다.

 

감나무에서 감을 딸 때면 까치 밥으로 두 서너 개 남겨놓아라 당부하시고, 부엌에서 일하는 형수와 누나에게는 쥐 밥을 남겼다. 또 뜨거운 물 식혀서 버리라고 하시며 까치, 쥐, 지렁이 모두가 다같이 살아야 우리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다.

어느 날 새벽 집 근처 숙지산을 걷다가 눈이 내려 옷 위를 가볍게 굴러 떨어지더니 옷깃에 붙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눈을 맞고 집에 가면 옷깃을 털어 주시고, 비를 맞고 들어서면 젖은 옷을 말려주셨다. 그 때마다 손길이 그리워 살며시 부르며 품에 안겨 조용히 잠들고 싶었다.

취직시험에 실패할 때 “한 두 번이 무어냐 삼세번이 있단다” 하시며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하시어 용기를 얻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밤길 걸어오는 우리들을 보시며 “자식들 제삿날 오는 길 밝게 달 밝은 날 잠자듯이 가고 싶다”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텔레비전 방송이 끝날 때까지 보시고 음력 오월 열 엿새 새벽에 옆에 주무시던 아버지도 모르시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을 사랑하셨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바빠 대신 보내주신 분이 틀림없구나”

송홍만 법무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