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원장으로 있는 시흥문화원에서는 시흥의 인물 선양사업으로 ‘시흥의 교육자 최긍렬 선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군자중학교의 전신인 군자고등공민학교의 설립자이며, 일제강점기 시흥지역 중등교육의 씨앗을 발효시킨 선생의 업적과 발자취를 재조명하기 위한 사업으로 ‘최긍렬 선생 장학회’와 뜻을 모았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로 먼 장래를 내다보며 세우는 계획이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정신없이 변화하는 오늘의 물질만능 자본주의 현실에서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근대교육의 장인 ‘학교’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서당과 4학, 향교, 서원, 성균관 등이 있었다. 이 곳에서는 주로 성리학을 가르쳤다. 1876년 개항을 앞뒤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근대교육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나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여 부강한 나라들을 따라잡자는 애국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 곳곳에 학교들이 세워졌다. 옛날 주로 가정이나 서당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던 것이 개항과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며 교육중심이 학교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인다.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보통학교’는 당시 가장 일반적인 배움의 장소였다. ‘소학교’라고도 불렀으며 중학교, 고등학교, 제국대학으로 이어지는 교육체계가 있었다.
‘향학열’이라는 말이 3·1운동 뒤부터 신문과 잡지에 자주 등장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신식학교인 보통학교를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바람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높은 향학열 때문에 지원자가 늘면서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이런 현상이 보통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학력의존도는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취업난, 청년실업도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부모들이 땅을 팔아 자식을 대학교까지 보내도 졸업 후 취직할 곳이 없었다. 의학, 치의학, 약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공학계열은 취직이 잘 되는 편이었으나 문과출신은 말 그대로 취업난 지옥을 겪어야만 했다.
기성세대가 취업난 해결로 내놓은 방안은 세 가지 정도였는데, 첫째가 눈높이를 낮추는 것, 둘째는 농촌으로 돌아가라는 것, 세 번째가 자기 사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졸업생의 50∼60%가 청년실업자로 지내야 했다고 하니, 수십 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정 상 종 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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