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엄마

‘엄마!’ 조그맣게 소리내어 불러본다. 참 부르면 부를수록 정겹고 가슴 뭉클해지는 이름이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어머니’를 이르는 말이 ‘엄마’라고 한다.

그런데 난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부를 엄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가끔 엄마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에 커다란 동공이 있는 듯 시리고 허전하다. 늘 옆에 계셔서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실 줄만 알았는데.

얼마 전 정호승 시인의 자작시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중에 93세된 가녀린 어머니가 낮잠 주무시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주검’을 미리보고 쓴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와 시노래는 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찡하게 했다.

‘잘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사고로 등이 새우처럼 구부러진 연로하신 어머니를 위해 자식으로서 별로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시에 담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라고 한다.

 

또한 가장 만만한 사람도 역시 ‘엄마’라고 한다. ‘엄마’는 조건없이 사랑하고 희생한다. 그래서 그 엄마의 포용하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내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정작 두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한 나는 어떠한가? 좋은 엄마는 못 될지라도 여느 엄마들처럼 힘든 투정을 받아 주면서 만만한 친구 같은 엄마로서 자리를 지키고 싶다.

근무처에서 엄마가 되기 위한 예비맘들을 많이 본다. 출산을 앞두고 산전 진찰을 받기 위해서나 임산부 교육을 받기 위해서 오는 맘들이다. 아마도 예비 맘들이 ‘엄마’를 가장 많이 생각할 때가 아닌가 한다.

분만실 밖에서 딸의 진통하는 소리를 듣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친정어머니의 모습도 종종 보게된다. 그러다가 신생아의 울음소리에 안도하며 기뻐하는 친정어머니와 딸의 모습은 세대공감 그 자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불현듯 10년 전 “니들이 게맛을 알아?” 라는 경험을 강조한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그런데 요즘 ‘엄마’이기를 미루거나 거부, 포기하는 여성들이 많아서 걱정이란다. 대부분 엄마들은 과년한 딸이 결혼하여 ‘엄마’도 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소원한다. 물론 딸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정정순 인구보건복지협회 경기지회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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