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남양부사 윤계 순절비 앞에서

내 고향 남양 오리정 길가에는 큼직한 대리석 비 하나 서있다. 남양부사윤계순절비(南陽府使尹棨殉節碑)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몇 번이고 일러주셨고,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은 충신의 고장이라며 자랑을 하셨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님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하였으나, 청나라 군사들이 성을 포위하고 이웃 고을을 약탈했다. 이 때 이 고을 남양부사는 군병을 불러 모아 맞대결을 하였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궤멸되자 관아의 뜰 아래 두 개의 깃발을 마주 세워놓고 대청마루에 팔짱을 끼고 앉아 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적장이 무릎을 꿇으라고 다그치자 “머리가 잘릴지언정 무릎은 구부릴 수 없다(頭可截膝不可屈)”, “죽을지언정 너희 오랑캐를 따르지 않겠다. 왜 빨리 죽이지 않느냐(死不汝從胡不速殺)”며 호통을 치셨다.

적병은 더욱 성이 나서 마침내 창을 어지럽게 휘둘러 몸에 살 한 점도 없이 하였으나, 꾸짖기를 계속하자 적이 혀를 잘라 공(公)은 순국하시었고, 현리(縣吏), 관노(官奴), 가복(家僕)까지도 다 함께 순국하였다.

 

공의 자는 신백(信伯)이요 본관은 남원(南原), 할아버지 윤섬(尹暹)은 임진왜란 때 상주(尙州)에서 순국하셨고, 아우 윤집(尹集)은 삼학사의 한 분으로 청나라에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공은 효심과 우의가 두텁고 지극하여 집안을 잘 단속하였으며, 벼슬에 올라서도 오직 평온하고 조용하여 충성된 마음이 간절하고 지극하셨다. 수라상을 맡은 관리가 아무런 준비가 없을 것을 염려하여 진수(珍羞)를 진달(進達)하려 하였으나 세 번 모두 되돌아오자, 그 때부터 입에 어육(魚肉)을 대지 않으셨다.

효종은 한 집안에 충신 세분이 있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라 하셨고, 현종은 현리(縣吏) 등 5인들에게 증직(贈職)하시고 자손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셨고, 읍인(邑人)들도 공의 충의를 잊지 못하고 비석을 세우려고 글을 청하였다.

생각해보니 충의한 성품은 하늘로부터 균일하게 받은 것으로 성현(聖賢)이나 길 가는 사람이지만, 그 마음을 온전하게 지니는 사람은 드물건만 공만은 배운 바가 바르고 수양한 바가 깊어서 이와 같이 간직하였도다.

신하들의 진청(陳請)과 두 분 임금님의 포숭(褒崇)과 읍인 들의 추모가 어울려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그리 하라고 한 바도 없는데 그렇게 하였다(亦所請不期然而 無所爲而爲者矣)’는 말과 같이 되었구나. 우암선생(尤菴先生)이 지으신 비문이다. 임들의 하나 같은 충성심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송홍만 법무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