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정조의 효심따라 62.2㎞

방학을 맞으면 아이들의 하루는 길어진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방학이면 시내(川)에 몸을 담그고 산이며 들이며 안가는 곳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하루 24시간이면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니, 이 얼마나 호시절인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방학 생활은 그 시절 만큼 자유롭진 않은 것 같다. 放學(방학)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학원이며 과외며 선행학습에 바쁘기도 하지만 나가 뛰어놀 산도 들도 많지 않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알찬 방학을 위해 필자가 원장으로 있는 수원문화원에서는 매년 ‘정조대왕 능행차길 체험순례’를 개최해 청소년과 학부모들의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부 화산(현 화성시 태안읍)으로 옮긴 후 11년 동안 모두 13차례나 부친의 묘를 참배하러 서울에서 수원으로 능행을 하여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 이러한 정조의 능행길 속에 녹아 있는 효심을 따라 걸으며 효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능행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기회를 갖고자 수원문화원에서는 매년 능행길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올해로 아홉번째를 맞은 ‘능행차길 체험순례’는 전국에서 모인 262명의 초·중·고 학생으로 구성된 순례단원들과 함께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 융릉을 거쳐 수원 화성에 이르는 62.2km의 길을 3박4일 간의 일정으로 체험하고 지난 8월 1일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

이번 순례길은 이례적인 폭염 속에서 진행돼 아이들이 잘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뜨거운 태양은 발걸음을 더디게 했을 뿐 순례단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강했고 이번 순례를 통해 시련에 주저앉지 않고 넘어 서는 힘을 배우고 정조의 효심을 마음속 깊이 새겼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형제도 많지 않고 핵가족 속에서 자라 저만 알고 인내심도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처음 마주한 아이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정렬하고 바른 모습으로 듬직함을 보였고, 고된 순례길 속에서도 서로 격려해주고 뒤쳐지는 친구를 이끌어주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의젓한 모습에서 젊은세대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여름은 무덥지만 또한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이다. 방학을 통해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이 여름날 더욱 푸른빛을 띠는 나무들처럼 성장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참신한 사고를 통해 새 희망을 꿈꿀 수 있길 바래본다.

염상덕 수원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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