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나누는 것이 DNA

태어나면 죽는다. 이는 절대적 참이다.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성탄전야든 연등이 길을 잇는 초파일이든 태어나는 아이가 있고 죽는 이가 역시 존재한다.

이런 참(眞) 앞에서 ‘왜’라는 물음은 무수히 제기되나 답은 명쾌하게 와닿지 아니한다. 심지어 그 물음조차 잊고 살고 피하기 일쑤지만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든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삶에 있어서 옛날엔 등 따습고 배부르면 부러울게 없이 행복을 누렸으되 요즘은 의식주가 해결되어도 부족함을 느낀다. 국민소득이 국민행복과 상관관계는 높지만 절대적 정의 관계는 되지 아니한다. 기초생활도 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느끼는 부족함이나 수십억 아파트 거주자가 더 채우려 발버둥치는 공허함이나 그 수준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별반 다를 게 없다.

개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라는 거리 동심원을 맘속에 그려 놓고 살펴보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가족과 사회와 철저히 유리된 ‘자기’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거나 망망대해 천애고도에 홀로 있는 것이어서 행복할 리 없다. 가족 구성원 간에 한 명이라도 뭔가 모자람이 있다고 그 스스로 느끼거나 식구가 겪는다면 다툼이나 정적이 있기 마련이고 화목할 리 없다. 사회 구성원 간에도 있는 자와 없는 자간에 투쟁하거나 누구는 너무 많고 나머지는 너무 적으면 갈등과 반목이 없을 수 없고 나아가 해체의 위기까지 갈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개인의 불행, 가족의 불화, 사회의 위기는 무엇에서 비롯되었을까라는 물음에 수많은 똑똑한 분들이 답을 내놓았다. 개인도 가족도 사회도 그 답을 안다. 비우고 나누고 베푸는 것임을. 그런데 알면 뭐하나, 행하지 아니함은 앎보다 못한 것을, 행함을 강제하면 있는 행도 사라짐을.

그래도 다행임은 사람은 역시 인간답다는 것이다. 선함이라는 DNA를 본디 갖고 있다. 성악설보다 성선설이 더 와 닿고 익명의 독지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남선녀의 쌈짓돈이 구세군 냄비를 채우는 것이 이를 실증한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선수를 응원하며 어려운 상황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음적 나누기로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도 행복하게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성금이든 재능이든 자기 것을 나눠주는 것이 사회를 윤택하게 한다. 곧 나누는 것이 삶의 길이다. 꼭 덧붙이고 싶은 건 있는 사람이 나눔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게 노블리제 오블리쥬로서 마땅한 도리다.

 

최 유 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수원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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