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사라진 선생님들

학교폭력 사건 및 그에 기인된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끊이지 않고 발발하고 있다.

OECD국가 중 국민 자살률 1위를 차지, 언필칭 자살공화국이라 뒤집어쓴 불명예를 청소년들 까지 견고하게 뒷받침 하는 터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기실 학교폭력의 문제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사고 발생시 마다 관계당국의 대책들이란 학교 내 CCTV증설이니 스쿨폴리스 배치니 하는 대증요법적 조치에만 머무는 듯하다.

학교폭력으로 자살에 이른 학생들의 유서마다 어김없이 ‘무능하고 제구실을 못하는 교사들’이 아픈 울움으로 적시되어 있고 보면, 직무 유기성 근무형태에 익숙해져 버린 교사들에 대한 질타와 더불어 제대로 된 직무수행을 촉구하기 위한 감독과 동기부여 방안들이 앞서 제기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라 할 것이다.

교사들, 특히 단체행동에는 이력이 있는 전교조 정도라면 이쯤에서 학교폭력추방 결의 대화라도 한번은 할 만한데 쥐죽은 듯 조용하니 그 또한 괴이한 노릇이다.

‘학생인권조례’를 가치로 내걸고, 교사의 학생에 대한 필요악적 체벌조차 ‘학생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실현을 위해’ 핏발선 눈으로 반대해 온 전교조의 논리라면, 학생간의 폭력에 따른 제자들의 자살사고 앞에서는 더욱 흥분하고 분연히 토로하는 구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쿨폴리스제도는 한 때 경찰력의 개입이 교육현장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며 자신들이 알아서 할 테니 준사법권을 달라는 전교조의 요구가 있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각급 학교에서 경찰관의 학교상주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또한 어불근리(漁不近理)한 면이 없지 아니하니, 그렇잖아도 부족한 경찰력에서 학교마다 배치할 경찰관을 차출·배치하기도 어렵거니와, 학교마다 수십 명의 교사가 건재하고 있음에도 단 한명 경찰관의 배치를 갈구해야 될 만큼 교사란 학교폭력 앞에서 의미가 없는 존재인 것인지 납득이 가질 아니한다.

스스로 만들어 온 교권추락을 핑계 삼고 CCTV와 스쿨폴리스라는 어설픈 대책 뒤에 숨어서 노닥거리는 교사상이 횡행하는 한 학교폭력은 결코 잠재울 수 없다. 교육의 질이 선생님의 질을 넘어설 수는 결코 없는 바에야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무한책임을 교사들은 늘 상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요즈음 아이들이 옛날과 달라 생활지도가 어렵다는 하소연은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도 변명할 게 없다. 교내 폭력에 휘둘려 꽃다운 삶을 마감하고 만 아이들의 유서 곳곳에 표집되어 있는 비겁한 교사들의 행태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사라진 교정―관심의 사각지대를 그냥 두고서야 수백 개의 감시 카메라를 증설한들 대체 무엇을 포착해 낼 것인가. 바로 그 곳에서 학교폭력은 빚어지고 피해 학생들의 가슴 옥죄는 절망감들은 손잡아 주는 이 없어 팽개쳐지고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사들의 게으름과 비겁이 빚어낸 상처로 하여 교정의 어느 외진 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아이들이 있을까 마음이 아린다.

짝퉁은 사고파는 물건에만 칭해지는 게 아니다. 제발 교사들이 정신 차리고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조를 짜 시간별로 수시로 교정을 둘러보고, 문제 학생들의 상담도 두려움을 가지거나 귀찮아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만 하리라. 교사 본연의 임무라 할 선생님이 있는 학교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학생교육에는 관심도 없이 전임 국정원장을 업무방해죄로 고발이나 하는 전교조의 엉뚱한 그 치기와 치열함이 학교폭력에 대한 자신들의 직무유기에도 똑같이 발현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리해서 교사들의 자기직업을 밝히는 장소에서 더러 ‘선생님’이라고 자신을 높이는 실수를 보여도 선생님의 높이로 지켜보고 받아 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 태 희 전 법무부 교정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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