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일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쯤이다. 스물네 살 어미의 모정(母情)은 전쟁고아를 볼 때마다 죽은 자식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살리는 전쟁’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전염병이 돌면 밤을 새워 간호하고 아이들이 아프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한 채 쪽잠으로 지새운 날이 별처럼 많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경동원은 대궐이고 천국이다. 적어도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잖은가.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라는 일반 가정의 아이들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게 키우고 싶은지라 늘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아이들 마음의 깊은 응어리와 아픔을 씻어주고 자존감을 끌어올리려면 몇 곱절 사랑을 쏟아 부어야 했다. 부모 한 사람이 1~2명의 자녀를 돌보는 것 보다 더 많은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을 24시간 먹이고 기른다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다. 돈도 사람도 늘 부족하다.
보육사업을 접을 고비도 있었다. 1970년 도시구획정리사업에 따라 고등동 건물 한가운데 도로가 뚫리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가뜩이나 재정 여건도 열악한데, 아이들은 소음과 먼지에 시달려야 했고 “그만두겠다”는 나를 남편이 말렸다. “일단 보육사업을 시작했으니 끝까지 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남편과 나는 사재를 보태어 광교산 자락에 땅을 사고 건물을 신축했다. 남편이 직접 재료를 구입하고 벽돌을 쌓으며 9개월 간 손수 건물을 지었다. 경동원을 거닐며 남편의 손길이 깃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애틋하다.
생후 36개월이 되면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이들 성장 발달에 어려워 1995년 경동어린이집을 개원했지만, 아직도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이별을 되풀이 한다.
이 일대가 상수원보호구역 와 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지정돼 추가시설 확장이 어렵기 때문이다. 별도의 수익사업 없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금과 후원에만 의존하다보니 늘 재정 마련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겨울을 나려니 난방비도 부담이 되고 노후된 시설공사 등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튼튼한 어린이, 명랑한 어린이, 정직한 어린이’라는 원훈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고 행복한 어린이로 자라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직접 지켜보고 있다. 주눅 들지 않고 늘 자신감 넘치는 아이로 커가는 걸 볼 때 마음 뿌듯함을 느낀다.
지난달 말 아이들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고양 킨텍스에 경기국제보트쇼를 다녀왔다. 그래서 “우리 아가들 잘 갔다 왔어?” 하니 아이들이 “할머니!” 하고 달려들면서 “완전 좋아”라 크게 외치면서 웃음가득 얼굴에 행복감을 꽃피운다.
한 명 한 명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안아 주면서 남은 인생 아이들과 365일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의 행복가득 웃음 가득한 모습에 감사하며 아이들 뒷바라지에 정열을 태우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밝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우리 보육사님 여러분, 여러 후원기관과 자원봉사자 여러분께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정의순 경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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