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일화를 전하는 대부분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관직 생활동안 그의 청렴함과 강직함을 대변해 주고 있다. 때문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 그의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영에 속한 발포라는 곳에서 만호(지방의 진에서 군사를 통솔하는 종4품의 벼슬)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전라좌수사 성 박이 이순신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왔다. 좌수사는 전라 좌수영의 우두머리로 이순신을 직접 지휘하는 직속상관 이었다.

“좌수사께서 이곳 발포 진영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십니다.” 심부름꾼이 송구스럽다는 듯 이순신에게 말했다. “무엇에 쓰신다고 하더냐?” “예, 거문고를 만드는데 쓰신다고 하더이다. 좌수사께서는 풍류를 즐기시니까요.”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생각했다. ‘아니, 나라가 이토록 위급한 시기에 거문고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려 하다니!’ 그러나 그런 기색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좌수사께 말씀 드려라. 뜰의 오동나무도 나라 것이니 함부로 베어 쓸 수 없다고. 하물며 전함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거문고를 만드는 것임에랴.” 심부름꾼은 얼굴이 하얘져서 돌아갔다. 하찮은 만호 따위가 우두머리인 좌수사에게 대든 셈이었으니, 이제 이순신의 운명은 바람결에 쓸려갈 낙엽과도 같았다.

 

심부름꾼한테서 이순신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좌수사 성 박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나, 이순신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성 박은 자신의 뜻대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지 못했다.

이처럼 발포 만호로 재직 중일 때의 이순신은 관직사회나 군대 내부의 불합리한 일들과 맞닥뜨려 동료장교나 상관으로부터 악감정을 사는 일이 많았다.

호남지역은 생산되는 물품이 많은 곳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수군 포구는 일종의 상업 중심지 여서 많은 재화가 오갔고, 그래서 장교나 장수는 이곳을 한밑천 챙길 수 있는 곳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청렴하고 강직한 이순신과는 아무래도 부딪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군대의 잘못된 관행 가운데 장교들이 복무할 군인에게서 사사로이 베를 받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이른바 방군수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이러한 이순신의 자세는 다른 장교들이 마음대로 부정을 저지르기 어렵게 만들었고, 그것이 그에 대한 비방으로 나타나곤 했다.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 국가로 나아가는 데 공직자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대한민국 공직자들이 이순신 장군이 가졌던 애국충정과 공직자로서의 청렴한 자세를 다시 아로 새겨야할 때이다.

박원철 경기도 청렴대책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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