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현장의 발견, 실천 용기가 곧 창조”
지난 1986년부터 10여차례에 걸쳐 발생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서 육감(六感)에 의지하는 시골형사 박두만(배우 송강호)과 사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는 도시형사 서태윤(배우 김상경)은 정반대의 캐릭터다.
한 명은 전통적인 수사방법을 맹신하고 다른 한 명은 이를 시대에 뒤 떨어진 아집이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물ㆍ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두만은 범인이 현장에 털 한오라기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무모증인 사람을 찾아 나선다. 사건 파일을 검토하던 서태윤은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범행대상이라는 공통점을 밝혀낸다.
자, 그럼 사건현장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범죄행동분석가, 일명 프로파일러는 이 둘 중 누구일까?
■ 정답은 두 명 모두
영화 속 긴장과 재미를 위해 나눠 놓았지만, 크게 보면 둘 모두 사건현장에서 범죄행동을 분석하고 수사하는 프로파일러다.
프로파일링이란 현장과 자료, 육감과 과학을 총망라해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 용의자의 신원(특징)을 압축하는 수사기법이기 때문이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살인ㆍ강도 등 중요 범죄자와의 면담 및 현장재구성을 통한 범죄분석이다.
무동기ㆍ연쇄ㆍ이상 범죄 등 강력사건 발생 시 범인 유형 및 범행동기 분석을 통해 범인의 거주지를 추정, 참고인 진술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분석한다.
특히 20세기가 치정, 원한, 생계문제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던 세상이었다면, 21세기는 사회, 제도에 대한 분노를 불특정다수에게 표출하는 묻지마범죄, 연쇄범죄 등이 판을 치며 프로파일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런 유형의 범죄는 발단과 목적에서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사건이 발생하면 용의자를 분류하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과 수사기법을 도외시했던 1990년대 말까지는 말이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서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 프로파일링이라는 수사기법을 처음으로 도입ㆍ운영 중인 권일용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를 만났다.
그는 ‘창조란 발견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라고 말한다. 프로파일링을 도입한 계기도 마찬가지였다.
■ 현장의 재구성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1990년, 권 교수는 일선 경찰서로 배치돼 본격적인 형사업무를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해도 과학수사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수 많은 범죄의 동기와 목적이 분명했기에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시기다.
당시에는 금품강취라던가 치정과 원한에 얽힌 범죄가 대부분이어서 현장을 수사하면 용의자의 신원을 특정하고 수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로 ‘막가파’, ‘지존파’ 등 범죄의 동기와 목적이 이전까지의 범죄와는 다른 범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없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등 해를 가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막가파나 지존파, 유영철 등은 이전까지의 범죄와 달리 개인의 문제에 따른 분노 등을 불특정다수에게 쏟아내는 특징을 보인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의 현장조사만으로는 피해자와 범인의 인과관계를 밝혀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치정, 원한, 금품에 따른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범죄”라면서 “현장에 남아있는 용의자의 행동패턴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 프로파일링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은 과학수사의 한 기법으로 현장에 남겨진 혈흔형태를 분석하는 등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권 교수는 “수사를 하다보니 ‘과학적으로 증거를 찾으면 범인을 잡는데 더 용이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 “미국 등에서는 1970년대부터 활성화된 프로파일링 기법을 배워 현장에 응용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밥은 먹고 다니냐?
현장감식요원으로 수도 없이 사건현장에 출동했던 권 교수는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한다. 유사사건의 현장에는 용의자간 유사한 행동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권 교수는 “사건 유형별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 현장에 남아있는 행동패턴으로 용의자를 최대한 압축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면서 “이에 1999년부터 프로파일링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미 FBI의 프로파일링 연구보고서를 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자신감을 얻은 권 교수는 그 때부터 1990년대 이전 20년간의 살인사건 800건 자료를 모두 검토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에서는 그럴 시간 있으면 현장나가서 지문 하나라도 더 찾아내라는 핀잔 아닌 핀잔도 들었다.
권 교수는 “당시에는 프로파일러란 명칭도 사용하지 않았을 때고 그런 업무를 한 전례도 없는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권 교수는 확신에 차 있었다. 범죄의 동기와 목적, 수법까지 급속도로 변화하는데 이전까지의 수사방법만으로는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살인사건 800건에 대한 자료분석 등을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권 교수는 2004년부터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대한 살인 및 성폭행 범죄자 800명을 인터뷰했다.
권 교수는 “인터뷰를 하면서 어린 시절은 어떠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들었다”면서 “그렇게 범죄자들의 노트가 만들어졌고 노트 속 범죄자가 100명이 되고 200명이 되고, 800명이 되자 어떤 범죄현장이든 ‘범인은 어떤 캐릭터의 사람이겠구나’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법죄현장의 발견은 곧 창조
권 교수는 이 같이 범죄자의 행동패턴 등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2004년 유영철, 2006년 정남규, 2009년 강호순, 2010년 김길태 등 연쇄 살인·강간 사건 해결에 기여하자 프로파일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검거 과정뿐 아니라 1대 1 심문으로 여죄 자백을 이끌어내는 데도 큰 역할을 하면서 2006년부터 경찰은 경장 특채로 전문 프로파일러를 채용하기 시작, 현재는 권 교수 외 37명의 프로파일러가 활동하고 있다.
권 교수는 2011년 과학수사대상을 받아 경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
2009년 강호순 사건 당시 범행동기와 거주지 등 범인의 특성을 분석해 검거했으며, 2010년에는 한국형 연쇄강간범 거주지 예측 및 알고리즘도 개발했다. 미국 프로그램 대비 예측력이 10배에 달한다.
또 2010년에는 김길태 사건을 범인 은신처 등 분석해 검거했으며, 2011년 울산 봉대산 연쇄산불사건에서도 범인 거주지 및 직장 예측이 적중했다.
이런 성과와 더불어 CSI 등 미국범죄드라마 등이 인기를 끌면서 프로파일러를 꿈꾸는 10~20대 청소년과 대학생들도 많아졌다.
경찰청 수사국 소속으로 7~8년전부터는 경찰수사연수원에서 외래교수로 프로파일링을 강의하던 권 교수는 아예 올해부터는 전임교수로 부임했다.
9월 설립되는 범죄연구센터에서 강력미제사건을 분석하라는 추가 업무도 지시받았다고 한다.
권 교수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면…, 주변의 격려와 응원이 없었다면…, 프로파일링 도입은 더 늦어지고 미제사건도 많았을 것”이라면서 “창조란 발견이며, 그 발견을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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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용 교수는…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서 2009년 강호순 사건 당시 범행동기와 거주지 등 범인의 특성을 분석ㆍ검거. 이어 2010년 한국형 연쇄강간범 거주지 예측 및 알고리즘 개발. 같은해 김길태 사건 수사 중 범인 은신처 등 분석ㆍ검거. 2011년 울산 봉대산 연쇄산불사건 범인 거주지 및 직장 예측 적중. 이러한 성과 등을 인정받아 과학수사대상 수상(경감으로 1계급 특진). 2006년부터 경찰수사연수원 외래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3년 2월 경찰수사연수원 전임교수 부임.
안영국기자 an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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